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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말씀 묵상

빵점짜리 시험지 - 빛을 받은 자에게 왜 고난이 오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13.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브리서 10:32~35)

어떤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한국에 처음 선교사가 들어오던 시절부터 복음을 붙들어 온 가문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예수를 믿었고, 그 어머니의 부모는 "
저 먼 마을에 예수 믿는 총각이 하나 있다"는 말 한마디에 다른 조건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딸을 시집보낼 만큼 열심히 믿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성경 말씀 외에 다른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웬만한 목사보다 신앙이 낫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그 자부심은 틀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사업도 크게 했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일군 것이라 더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딸이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총명한 딸이 케임브리지 대학 입학 허가를 받아 놓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
어쩌면 저렇게 이쁘냐"고 칭찬을 아끼지 않던 딸이었습니다. 그 딸이 이 어머니의 진짜 힘이었습니다.

그녀는 시편 기자처럼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은 달랐습니다. "
나의 힘이 되신 내 딸이여." 그러던 중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딸이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는 시킨다. 가거라." 그러나 딸은 여행을 간다며 집을 나선 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목사님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 편지에서 그 어머니가 고백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슬픔이 아니라 "
어떻게 하면 자살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창피했습니다. 사고사로 포장할 수 없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모르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만큼 사랑한다고 했던 딸의 죽음 앞에서, 그녀가 먼저 챙긴 것은 자신의 체면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직면하면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나의 마귀성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그녀는 누구보다 말씀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딸의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 앞에서, 그 모든 신앙의 연륜이 한순간에 발가벗겨졌습니다. 남은 것은 자존심 하나였습니다. 여전히 '
'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여기서 '큰 상'은 구원입니다. 크고 작은 상이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는 어떠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빛을 받은 후에 왜 고난이 찾아오는 것입니까?

1873년, 찰스 스펄전은 런던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불리던 시절, 극심한 우울증으로 강단을 비워야 했습니다. 수천 명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당황했습니다. "
하나님의 사람이 왜 저렇게 무너지는가." 그러나 스펄전 자신은 그 고통의 시간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그 어둠 속에서 비로소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설교의 성공 위에 서 있었는지를 보았다." 고난은 우리가 실제로 무엇 위에 서 있었는지를 드러냅니다. 그것이 고난의 역할입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그 밀알의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된 자들의 삶도 같은 길을 갑니다. 십자가를 지고 땅에 떨어져 썩는 것, 죽는 것입니다. 씨앗이 잘 썩도록 돕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름입니다. 거름은 싹에게 영양분을 주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더 잘 썩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더 능력 있고 탁월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힘이 아닙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 땅에서 우리에게 밝히 가르쳐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추악한지를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
나는 스스로 존재의 가치가 있고, 내 삶을 내가 경영할 힘이 있습니다"라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 죄가 용서되기 위해 하나님이 죽으셨습니다. 죄가 하나님을 죽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나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창조주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 하필 십자가입니까? 머리에 가시 면류관, 내 생각, 내 지혜가 멈추어야 합니다. 손발에 못, 내 손발이 내 뜻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이것이 죽은 흙의 자리입니다. 원래 우리의 자리가 그러해야 합니다. 산 자인 척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십자가로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짜 가치라고 여기고 의존하던 것들을 하나씩 걷어가십니다. 자식을 자식보다 더 사랑하면, 하나님은 마음속에서 그 자식을 거두십니다. 돈이 생명이 되면, 그것을 불태우십니다. 그 모든 경험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
예수 아니면 안 되겠구나"로 내려앉게 됩니다.

예수님이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신자와 비신자를 가르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양과 염소는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둘 다 교회 안에 있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예수님은 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목마를 때, 굶주렸을 때, 병에 걸렸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너희가 나를 도왔다." 그런데 목마르고 배고프고 병들고 갇혀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가져가시기 위해 이 땅에 지극히 작은 자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약한 모습으로 사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분을 죽였습니다. 빛이 어둠에 왔는데, 어둠이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양은 그 예수를 압니다. "
내가 목마르고 배고프고 갇혀 있는 자라는 것을 예수님이 가져가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자가 나였구나"를 압니다. 그래서 그 눈으로 이웃을 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지극히 작은 자로 봅니다.

염소는 다릅니다. "
내가 예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냈을 때, 그 보람을 절대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심판 날에 염소들은 다 말합니다. "우리가 했습니다." 양들은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언제 그리하였습니까?"

19세기 벨기에의 신부 다미안은 하와이 몰로카이 섬의 나병 환자 거류지로 자원해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세상이 버린 자들의 섬이었습니다. 그는 16년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그는 강단에 서서 평소와 다른 말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
우리 나병 환자들이여." 자신도 나병에 걸린 것을 그날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들과 같은 자임을 알았기에 그들 곁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행위가 아닙니다. "나도 그런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할 답안지는 무엇입니까? "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것은 빵점짜리 시험지입니다. 그런데 그 빵점을 내놓아야 하나님이 예수의 백점 답안지를 내 것으로 쳐주십니다. 어줍잖은 삼십 점, 사십 점으로는 안 됩니다. 야고보서는 하나라도 틀리면 빵점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시험지도 내밀면 안 됩니다. 오직 빵점짜리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 어머니가 그 고백의 자리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딸의 죽음 앞에서도 자존심을 먼저 챙긴 자신을 직면하면서, "
내가 진짜 죄인 중의 괴수가 맞구나"라는 시험지를 들고 하나님 앞에 서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오십 년 신앙이 이 고백 하나에 이르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기록이 되었나이다."

우리는 땅의 죽은 흙입니다. 그런데 그 흙 위에서 하나님이 창조하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창조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고난도 수치도 상실도, 이미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로봇이 아닙니다. 꼭두각시도 아닙니다. 먼지입니다. 그 먼지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금 살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조금씩 더 "
예수 아니면 안 된다"로 내려가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저 하늘 어딘가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려는 바로 그 자리에서 완전히 무장해제되어 하나님께 장악당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때 비로소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함을 버리지 마십시오. 비방과 환난 속에서도, 소유를 빼앗기는 자리에서도, 담대함을 붙드십시오. 그 담대함의 근거는 내 신앙의 연륜이 아닙니다. 내 고백의 깊이도 아닙니다. 내가 빵점이라는 것을 알고, 그 빵점짜리 시험지를 기꺼이 내놓는 자에게 예수의 백점을 입혀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 하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