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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말씀 묵상

믿음이 남긴 것 - 아벨의 예물, 그리고 죽음이라는 증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브리서 11:1~4)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랫동안 이 질문에 익숙한 방식으로 답해왔습니다. 삶이 변했습니까, 성격이 부드러워졌습니까, 봉사와 헌신이 늘었습니까? 교회는 이런 증거들을 찾고, 사람들은 이런 변화들을 내보이려 애씁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킵니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 그것은 결코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골고다 언덕 위에서 세 개의 십자가가 나란히 세워졌습니다. 가운데는 예수님, 양옆에는 두 강도, 그들은 같은 형벌을 받고, 같은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비웃었고,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 강도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그날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이 세상 속에서 무슨 증거를 남겼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래 살며 선행을 쌓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을 뿐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예화가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온 인류의 초상으로 제시합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좌우로 나뉜 두 강도인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 그 분리가 아담의 첫 두 아들에게서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역사의 끝까지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특별한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제사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이 착한 일을 했는지 나쁜 일을 했는지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한 사람에게는 믿음이 주어졌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결코 게으름의 산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땀을 흘려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성을 하나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가인이 화를 냈습니다. 이 분노를 잘 보십시오. 이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이런 확신이 깔려 있습니다. "
내가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내 노력이 왜 인정받지 못합니까?" 이것이 가인의 제사의 본질입니다. 인간이 땅에서 만들어낸 것으로, 인간의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을 하나님이 거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에게 "
근본된 토지를 갈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농사지어 잘 먹고 잘 살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나온 흙을 갈면서, 거기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오는 것을 보라, 흙인 네가 어찌 내 앞에서 가치를 주장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땅의 것은 처음부터 땅의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것만 받으십니다.

그렇다면 아벨은 어떻게 드렸습니까? "
양의 첫 새끼의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닙니다. 레위기는 명시합니다. "기름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첫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 창세기와 레위기는 같은 저자 모세가 쓴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아벨이 첫 새끼의 기름을 드렸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무엇을 받으시는지 알았다는 뜻입니다. '기름'은 메시아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 '첫 것'은 장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아벨은 오실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예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름을 몰랐을지라도, 그 실재를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히브리서의 대답은 믿음으로 단 두 글자입니다. 어쩌면 아벨은 어머니 하와에게 들었을 것입니다. 에덴에서 죄를 지은 날, 하나님이 어린양을 잡아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혀주셨다는 이야기를, 그 양이 죽어야 우리의 부끄러움이 가려졌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아벨의 마음속에 심겨졌을 때, 믿음이 그 이야기를 통해 일한 것입니다. 믿음은 선물로 주어집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밖에서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
믿음으로 드렸다"는 말은 "내가 열심히 믿어서"가 아닙니다. 믿음이 나를 끌고 가서 드리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은 아벨을 어디로 끌고 갔습니까? 죽음으로 끌고 갔습니다. 아벨은 아무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형 가인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무력하게, 저항도 보복도 없이, 세상은 그것을 보며 말했을 것입니다. "
그래서 그렇게 살면 뭐가 좋아? 쓸모없는 양이나 키우다가, 하나님도 안 알아주고, 형한테 맞아 죽었잖아."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예물로 증거하셨습니다. 아벨의 예물이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 쓸모없다고 본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유일한 가치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지금도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가인에게 맞아 죽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 충격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다섯째 인이 떼어질 때, 하늘의 제단 아래 수많은 영혼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부르짖습니다. "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그들이 죽은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증거를 가졌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
역사 속에서 믿음을 가진 자들이 그 수가 다 찰 때까지 하나씩 하나씩 죽어갑니다. 그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화려한 성공의 역사가 아닙니다. 세상에게 맞아 죽는 역사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한 시계 수리공 가족이 유대인들을 숨겨주다가 나치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코리 텐 붐과 그녀의 가족들입니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돌아가셨고, 언니 베시는 강제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베시가 죽기 직전, 코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코리, 여기보다 더 깊은 구덩이는 없어.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깊으니까." 그녀들이 세상에 남긴 증거는 무엇입니까? 수용소에서의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양과 염소를 가르는 심판 장면이 나옵니다. 왕은 말합니다.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느니라." 이것을 흔히 이렇게 설교합니다. "예수님이 거지의 모습으로 오실 수 있으니, 길에서 만나는 불쌍한 사람을 예수님 대하듯 하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부담을 느끼며 선행을 합니다. '혹시 저 사람이 예수님이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으로 한 선행은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에 남습니다. 자기 것이 됩니다.

심판 날, 염소들은 말합니다. "
주님, 내가 그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말합니다. "주님, 내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양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굶주렸다, 목말랐다, 헐벗었다, 옥에 갇혔다, 병들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본래 모습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나 부끄러움에 벌거벗겨진 아담처럼, 생명의 떡 없이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처럼,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시고, 빨가벗겨져 달리시고, 저주받은 나무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소자 되신 예수가 나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는 것이 소자를 대접한 것입니다.

"
믿음이 이긴다"는 말을 우리는 흔히 이렇게 이해합니다. 믿음이 지금 내 앞의 상황을 이긴다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두려움을 물리치고, 결국 승리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보여주는 믿음의 역사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벨은 이겼습니까? 세상의 눈으로는 처참하게 졌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그 영혼들은 이겼습니까? 그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믿음이 이긴다는 것은, 믿음이 나를 이긴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나를 죽여낸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분노처럼 내 안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
내가 이만큼 했는데"라는 목소리를, 믿음이 죽여낸다는 것입니다. 내 의를 주장하고 싶은 욕망을, 믿음이 꺾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죽어가는 그 소자를 바라보며 "그분만이 나의 구세주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아벨이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감지됩니까? 어쩌면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감지됩니다. "저 사람도 죽고 있네. 이 사람도 죽고 있네." 세상이 가치 있다고 상정한 것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 세상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그 양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렇게 조용히 사라져가는 삶들, 그 삶들이 아벨처럼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