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브리서 11:7)
1970년대 초, 미국 테네시 주의 한 시골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농부 한 명이 멀쩡한 밭 한가운데에 거대한 구조물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울타리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 드디어 미쳤나 봐." 그의 아내조차 처음에는 남편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농부는 묵묵히 나무를 켜고 못을 박았습니다. 누가 물으면 그는 이렇게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허구의 이야기지만, 노아의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노아가 방주를 짓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사백팔십 세였습니다. 홍수가 임한 것은 육백 세였으니, 그는 백이십 년 동안 방주를 지은 것입니다. 백이십 년 세월 동안 그가 들었을 말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저 늙은이, 도대체 산꼭대기에서 뭘 짓는 거야." "비가 온다고? 비가 뭔지 알기나 해?" 조롱과 멸시와 모함이 그의 하루하루를 채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노아는 믿음에 이끌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뭔가를 잘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를 끌고 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 하나를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노아를 그 시대로부터 건지셨을까요? 혹시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노아는 도덕적으로 뛰어났고, 성품이 훌륭했으며,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남달랐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택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이야기는 '은혜'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창세기 6장 8절,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노아가 건짐받은 것은 그가 남들과 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노아에게 찾아오셔서, 그의 마음속에서 그 시대 사람들이 추구하던 것들을 빼앗아 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건지신 것이지, 그가 무언가를 잘해서 하나님의 눈에 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창세기 6장은 노아의 시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여" 네피림, 곧 용사와 유명한 자와 거인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구학적 기록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남자는 그리스도를, 여자는 교회 곧 죄된 본성을 가진 인간을 상징합니다. '사람의 딸들'이란 인간을 중심으로 이 세상을 더 훌륭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가려는 인본주의적 정신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혼인의 열매인 '네피림'은 강해지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문화와 문명입니다.
창세기 4장과 5장에는 두 계열의 후손 이야기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이 세상 문명의 설계자들입니다. 철기를 만들고, 악기를 발명하고, 도시를 건설합니다. 인간이 '힘'이라 부르는 모든 것의 꼭대기에 가인의 후손이 있습니다. 반면 셋의 후손은 낫 하나를 구하러 가인의 동네에 가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에노스 때에 이르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자기 이름을 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셋의 라인, 곧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이렇게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던 이들이 사람의 딸들과 하나가 되어 갑니다.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용사가 되고 싶고, 네피림이 되고 싶고, 이 땅에서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 솟아오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동행하시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딸들의 속성을 끊어내십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그것이 역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아벨, 에녹, 노아를 차례로 언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선언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무언가를 보고 나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주 이런 말을 듣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훌륭한 인격을 보여줄 때,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유명한 운동선수가 우승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말하면, 교계 신문에서는 "이 얼마나 훌륭한 전도의 기회인가"라고 환호합니다. 그러나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그 메시지는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저런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의 딸들, 곧 눈에 보이는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노아의 백이십 년은 설명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존경받을 만한 위인으로 만드셨다면, 분명 사람들이 "저 훌륭한 분과 함께 방주에 들어가고 싶다"고 몰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타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가족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세상은 노아를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노아를 조롱했습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현실입니다.
에녹에게 계시가 임한 날, 에녹은 이 세상에서 다른 나라 사람이 되었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이 떨어진 날, 노아는 이 세상에서 바보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들어오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 안에는 항상 두 가지 목소리가 있습니다. '사람의 딸들'의 목소리는 말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편안하게 살고,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은 그것을 끊임없이 죽여 갑니다.
신약이 에녹과 노아를 인용할 때마다 '심판'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이 심판을 전했다는 것은, 그들이 삶으로 심판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자존심과 가능성을 높이며 사는 이들에게 "이 세상은 반드시 망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세상으로부터 심판을 당하는 삶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 정권 아래서 바로 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탈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돌아왔고, 결국 전쟁이 끝나기 불과 며칠 전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삶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실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의 적이다." 믿음은 편안함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진리 위에 서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서기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처소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처소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예수님은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이 공포에 떨 때, 예수님은 안식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무감각함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풍랑이 그분의 머리 둘 곳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머리를 두신 분이기에, 세상의 풍랑은 그분을 삼킬 수 없었습니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자 이야기도 같은 진리를 다른 언어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귀신은 즉각 반응했습니다. "왜 우리를 불편하게 하려고 오셨습니까?" 예수님을 맞닥뜨렸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의 유익과 평안을 따지는 것, 그것이 귀신의 속성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귀신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고, 예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는 바다로 달려가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습니다. 돼지를 삶의 기반으로 삼아 살던 그들이 예수님께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 지역을 떠나 주십시오." 자신들의 유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기적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을 건드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렇게 반응합니까. "하나님, 이것만은 안 됩니다."
사도행전 27장의 유라굴로 광풍 속 바울의 이야기도 같은 진리입니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선주와 선원들이 있었고, 바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바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 항해가 큰 위험과 손실을 가져올 것입니다." 경험자들은 비웃었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압니다. 경험이 심판받고 믿음이 이겼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만물의 찌꺼기"라고 불렀습니다. 설거지하고 남는 그 찌꺼기, 그에게 그런 취급을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였습니다. 성도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그를 그렇게 대했습니다. 디모데후서에 이르면 그의 곁에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그를 끌고 갔습니다.
바울은 한 번도 자신이 훌륭한 위인임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것이 믿음에 이끌린 삶의 고백입니다.
모세는 3500년 전에 이미 경고했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것이 이루어질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려 하심이라."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노골적인 기복주의는 많은 이들이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복주의의 본질인 '나 중심주의'가 이제는 성화론이라는 옷을 입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더 나은 인격을 갖게 됩니다. 더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더 훌륭한 부모, 더 훌륭한 직원이 됩니다." 이것이 전도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상 받을 만한 나'를 목적지로 삼는 신앙입니다. 껍데기만 바뀌었을 뿐, '사람의 딸들'은 여전히 그 안에 살아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우리는 종종 오해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에스겔서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더러운 마음을 제하고 새 마음을 주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완성품으로 만드는 것이 생육과 번성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같은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 약속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내 백성, 내가 만들어 낸다."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모세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바울이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교회에서는 몇 명의 백성만 구하시고, 그 종을 다른 곳으로 보내십니다. 또 거기서 핍박받게 하시면서 몇 명을 건지시고, 또 다른 곳으로 보내십니다. 성도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지리멸렬해 보이는 삶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당신의 생육과 번성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계획과 비전과 다짐으로 하나님은 일하지 않으십니다.
미국의 컨트리 가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은 한때 "Why Me, Lord(주님 왜 저입니까)"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신의 신앙 고백을 담은 그 노래의 후렴은 이렇습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세요." 그는 이 나약하고 단순한 고백을 대중 앞에서 공표했고, 그 노래는 뜻밖의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 고백 안에서 무언가를 본 것이 아닐까요? 스스로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는 사람, 그저 "나는 혼자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 그것이 노아입니다. 그것이 에녹입니다. 그것이 바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닻을 올리십시오. 하나님이 이미 올려 주셨습니다. 노를 놓으십시오. 내가 노를 잡고 있는 한, 하나님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이끄실 때마다 우리는 브레이크를 겁니다. 우리 안에 있는 '사람의 딸들', 인정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고, 무언가를 이루어 내고 싶은 그 뿌리 깊은 욕망을 부수어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은혜로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냥 견디십시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사십시오. 예수만 꼭 붙드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삶을 통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또 다른 생육과 번성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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