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브리서 11:7)
몇 해 전,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온 한국의 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낯선 땅에서 한 작은 교회를 만나 깊은 은혜를 받았고, 돌아가면 자신도 그렇게 가르치겠다며 설교 원고를 얻어 갔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 목사님의 교회는 지역 신문에 실릴 정도로 크게 부흥했습니다. 설교가 한 시간 삼십 분에 달한다는 것이 기삿거리가 될 만큼 특별한 목회자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한국 교회의 한 부교역자로부터 이메일이 미국의 작은 교회 목사님께 도착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수년간 다른 목사의 원고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교인들이 알게 되었고, 교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목사로서 이것이 윤리에 맞는 일입니까?" 라고 그가 물었습니다.
미국 교회의 목사님은 전화를 걸어 한국에 있는 그 부교역자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담임목사가 자신을 속였다며 분개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담임목사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내가 여기에 뭘 더 빼고 보탤 실력이 없어서, 연구는 정말 많이 했지만 결국 그대로 나와버렸다." 실제로 그는 원고를 이해하고 소화하기 위해 자신이 처음부터 설교를 준비할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했습니다. 외울 때까지 읽고, 그 사람의 논리를 따라가며 자기 것으로 만들려 애썼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옛 신학자 박윤선 박사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그가 게할더스 보스의 신학책을 요약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낸 적이 있었는데, 훗날 제자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연구하고 또 연구해도, 이 사람을 넘어설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다." 그 정직한 고백에는 부끄러움보다 진실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미국의 목사님은 그 부교역자에게 물었습니다. "누구의 설교로 전해졌든, 거기서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전한 설교 중에 책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결국 그는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미국에 계신 목사님은 그 양심이라는 것이 언제까지 그를 지탱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는 표절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성경의 오래된 패턴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기로 결심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사람의 딸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의 혼인"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두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인지, 특별한 성도인지를 놓고 오랫동안 논쟁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정체를 알아내는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굳이 밝히지 않는 것을 캐내려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오래된 교만입니다. 정작 중요한 질문은 다른 데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런 만남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를 그냥 두셨을까요? 마치 에덴동산 한가운데, 가장 보기 좋은 자리에 선악과를 두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패턴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에서의 후손이 사는 땅을 한 걸음도 밟지 말라 명하셨습니다(신명기 2장). 그 땅은 이미 에서에게 주어진 기업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돈으로 사서 먹으라 하셨고, 그리하면서도 "사십 년 동안 너와 함께하사 네게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과 어울리면 그들이 올무와 가시가 될 것이라 경고하셨습니다(여호수아 23장).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그들을 다 쫓아내지 못했고, 사사기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심이라"(사사기 2:22).
여기서 하나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광야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고, 가나안은 우리가 몸담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두 자리 모두에, 하나님은 우리를 넘어뜨릴 수도 있는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남겨두십니다. 이것을 조금 더 가까운 이야기로 풀어보겠습니다. 어느 가정에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동생은 늘 성실하게 일했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형은 별다른 수고 없이도 사업이 잘 풀려 여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동생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면서도, 형의 삶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보다 형을 더 잘살게 하실까." 이 질문은 신앙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여정 한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통과하게 되는 광야의 한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그 형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동생 곁에 계속 두십니다. 왜일까요? 그것을 통해 동생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부러움과 비교의 마음을 이겨낼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용서하고 인내하라" 하신 그 말씀 바로 옆에, 하나님은 우리가 도무지 사랑하기 힘든 존재를 놓아두십니다. 그것이 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나는 이것을 지킬 능력이 없다. 그래서 예수가 필요하다"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관계들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재물, 명예, 심지어 자녀까지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에서의 후손"처럼 두십니다.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시험하고 훈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한 부모가 자녀를 신앙 안에서 훌륭하게 키워내고 싶어 애쓴다고 할 때, 그 마음 자체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그 열심의 절반은 "내가 이렇게 잘 키웠다"는 인정을 향한 갈망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고, 그럴수록 관계는 오히려 메말라 갑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모든 관계와 소유는, 결국 지나가야 할 정거장입니다. 실재하지만 영원한 집은 아닙니다. 참된 부모와 자녀, 참된 안식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소유하려는 마음 없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복음서에는 한 중풍병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친구들이 지붕을 뚫어 그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는 그 유명한 장면입니다. 흔히 이 이야기는 "친구들의 믿음이 좋아서" 병자가 나음을 입었다고 해석되지만, 본문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의 진짜 초점은 예수님과 서기관들의 대화에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켜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 눈에,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사실 둘 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오직 자신에게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그 서기관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면서도, 누군가의 흠을 발견하면 그것을 판단하는 데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진실은 이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중풍병자입니다. 그럼에도 은혜로 사함을 받은 자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이루어냈다는 확신에서 오는 안심이 아닙니다. 부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나,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 붙잡은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면서도, "그럼에도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 곁에 놓인 "에서의 후손들",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웃, 마음을 붙드는 소유, 놓지 못하는 관계는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예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 깨달음 앞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 하루도 예수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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