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브리서 11:8~10)
어느 소도시에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물었습니다. "여보, 어디로 가는 거예요?"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저기 강 건너 그 동네요." 아내가 다시 물었습니다. "거기 가면 뭐가 있는데요?" 남편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건 나도 몰라. 그런데 가야 할 것 같아."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를 펼쳐보면 그는 분명 가나안이라는 목적지를 알고 떠났습니다. 지도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몰랐던 것은 그 땅의 내용이었습니다. "가나안이 뭐길래 거기로 가라고 하시는 걸까. 이것을 몰랐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비슷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우리는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나아가는 그곳이 무엇인지"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어쩌면 평생을 두고도 다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아브라함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았지만, 그곳에서마저 나그네처럼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도착했다고 해서 이해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기 전, 부모는 이미 그 아이가 다닐 학교와 살게 될 동네를 정해두었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성격일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아이의 미래는 아이 자신의 그 어떤 노력보다 먼저, 부모의 결정 안에 이미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무슨 선택을 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역사를 시작해두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착하게 살면,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실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그림은 다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분명 선한 사람도 있었고 악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만든 것은 그들의 됨됨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구원의 저울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쪽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서관에서 귀한 책을 한 권 빌렸습니다. 그는 그 책을 아주 소중히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이제 내 것이니, 내가 어떻게 할지는 내 마음이다." 그는 책에 낙서를 하고, 표지를 뜯어 자기 이름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그러나 도서관 직인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책은 여전히 도서관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이렇게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믿음을 주셨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그것을 잘 지키고 키워가야 한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 16장에서 그는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믿음이 정말 아브라함의 소유물이 되어 그를 완벽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런 실패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아브라함을 훌륭한 사람으로 완성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통로였습니다. 그의 실패조차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인해 세상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그를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믿음 때문에 형의 손에 죽었습니다. 에녹의 이야기는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행이 그에게서 하나둘씩 것들을 거두어 갔습니다. 자식에게 온전히 마음을 쏟으려 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막으셨고, 아내를 사랑하는 데도, 명예를 추구하는 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지나치게 질투가 많은 배우자가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며 다른 모든 것을 끊어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에녹의 삶에서 세상적인 애착들을 하나씩 끊어내셨습니다.
남들이 구백 살까지 사는 시대에 그는 삼백 년 만에 데려가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축복처럼 보이지만, 실은 살아 있는 채로 세상에 대해 죽어가는 고통의 과정이었습니다. 에녹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속에 숨겨진 아픔을 함께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도 지금 산 채로 아들의 나라에 옮겨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어떻습니까? 그는 백이십 년 동안 배를 지었습니다. 배를 짓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린 것은 동물들이 먹을 사료를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그가 성실하다거나 착하다는 평판을 얻었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는 그저 "이 세상은 멸망한다"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붙들고 바보처럼 살았을 뿐입니다.
베드로전서는 노아가 "의를 전파했다"고 말합니다. 그 의는 도덕적 성실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아무리 여기서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다. 방주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 그가 전한 복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방주를 설명하지 않고, 멸망할 세상 속에서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법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느 은퇴한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다섯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사역했습니다. 은퇴할 무렵 후배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한곳에 오래 머무르며 뿌리를 내리고 싶으셨던 적은 없으셨어요?" 그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왜 없었겠나. 그런데 하나님이 자꾸 텐트를 접으라고 하시더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삼대가 한 장막 안에서 살았습니다. "장막 쳐라" 하면 치고, "거두고 떠나자" 하면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 땅에 기둥 하나 박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교회를 개척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곳에 평생 머물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꾸 이 세상 속에서 안정된 가족과 공동체를 이루어 그 안에 정착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가면 우리의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개 그 가족을 통해 내가 확장되고 내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에 사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신앙이 깊어질수록, 하늘의 소망이 선명해질수록, 세상은 우리를 점점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두 형제 같은 두 사람, 롯과 아브라함을 생각해봅시다. 롯은 눈에 좋아 보이는 땅,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 성문 앞에 앉아 재판관 노릇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성공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그의 손을 잡고 그 도시에서 끌어내려 할 때, 그는 미적거리며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 땅에 마음이 이미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상대적으로 척박한 가나안에 머물렀습니다. 애굽과 소돔 같은 땅은 인간이 물을 대면 곡식이 나는, 사람의 노력으로 소산을 얻는 땅입니다. 가나안은 다릅니다. 오직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땅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통제할 수 없는 땅에 머문다는 것, 그것이 아브라함의 삶이었습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무너졌습니다. 롯이 그곳에서 구원받은 것은 그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겨울, 한 노숙인이 교회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성도들은 그를 애써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다가가 자기 목도리를 풀어 그에게 둘러주었습니다. 어른들은 부끄러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종종 하나의 규율처럼 받아들입니다. "선행 목록"을 채우듯 실천하고, 그것을 근거로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자는 단순한 선행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소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과 어울리고, 율법의 틀 밖에서 움직이신 그분을 종교 지도자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적인 기준, 심지어 신앙 안의 율법주의적 기준으로 보면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 사람도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고 인정하는 것, 이것이 소자를 영접하는 참된 의미입니다.
어느 노인이 임종을 앞두고 목회자에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평생 이 신앙 하나 붙들고 살았는데, 막상 하나님 앞에 선다고 생각하니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목회자는 그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천국 가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의 강함을 이렇게 상상합니다. 극한의 고난과 박해 앞에서도 이를 악물고 굴복하지 않는 모습. 그러나 실제로 사람은 아주 작은 고통 앞에서도 대부분 무너집니다. 영화 속 영웅처럼 끝까지 버틸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은 대개 그런 고통을 실제로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진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고문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약함을 인정하며 "저는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 자신의 부족함을 끌어안은 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베드로와 유다를 비교해봅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세 번 부인했지만, 그 실패 앞에서 아무런 속죄의 행위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오히려 죄책감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유다가 더 진지하고 책임감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진정성이나 자기 처벌이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사를 떠난 그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그들은 강 건너 마을에 도착했지만, 그곳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여전히 다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을 이끈 것은 그들의 계획이나 능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힘, 곧 믿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우리의 의지나 도덕적 우수함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이 우리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지금도 우리를 이 세상에 완전히 정착하지 못하게 하며, 계속해서 하늘을 향해 텐트를 옮기게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그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광야의 정거장에서 (0) | 2026.07.01 |
|---|---|
| 믿음에 이끌린 사람 - 노아 이야기 (1) | 2026.06.22 |
| 믿음으로 옮겨진 사람, 에녹 (0) | 2026.06.05 |
| 믿음이 남긴 것 - 아벨의 예물, 그리고 죽음이라는 증거 (0) | 2026.05.28 |
| 죽었으나 오히려 말하느니라 (0) | 2026.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