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브리서 11:11~12)
강원도 산골 마을에 한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할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폐경을 지났고, 몸은 여기저기 삐걱거립니다. 어느 날 마을 이장이 찾아와 진지한 얼굴로 말합니다. "할머니, 내년 이맘때 아이를 낳으실 겁니다." 할머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 웃음이 터질 것입니다. 그것도 비웃음이 말입니다. "이 나이에? 내 몸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성경 속 사라가 그랬습니다. 여든아홉, 이미 몸의 기능이 완전히 멈춘 여인에게 하나님은 "내년 이맘때 아들을 주겠다"고 정확한 날짜까지 못 박아 말씀하셨습니다. 사라는 웃었습니다. 조롱의 웃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이삭"입니다. "웃음, 비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 이야기를 "사라가 나중에 믿음을 회복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식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라는 끝까지 자신의 상식과 경험 속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녀에게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 같은 후손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그녀가 "믿어서"가 아니라,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몸에서였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완전히 방전된 배터리에서 갑자기 전기가 흐른다면, 우리는 그 배터리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외부에서 전원을 연결했다는 것을 압니다. 사라의 몸에서 생명이 나온 것은 사라의 믿음이 강해서가 아니라, 밖에서 들어온 어떤 힘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 힘을 "믿음"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우리가 마음속에서 짜내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기 싫어하는 우리를 억지로 끌고 가는 힘에 가깝습니다.
어릴 적 예방주사를 맞으러 갈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이는 절대 스스로 걸어서 병원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엄마 손에 이끌려, 발버둥 치며, 울면서 끌려갑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른이 되어 그 시절을 돌아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예방주사를 맞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결코 스스로 원해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십자가로 걸어간 것이 아닙니다. 누가 죽고 싶어 하겠습니까? 누가 자기 것을 다 내려놓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면 우리는 이미 그 길 위에 서 있습니다. 발버둥 쳤지만 결국 끌려온 것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가 훗날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베드로가 갑자기 초인적인 용기를 얻은 게 아닙니다. 성령이 임한 뒤에도 그는 여전히 흔들렸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에게 공개적으로 책망받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유대인들과 밥을 먹다가 다른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이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결국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단번에 완벽한 사람으로 바꿔놓는 마법이 아니라,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우리를 그럼에도 끝까지 끌고 가서 결국 그 자리에 세워놓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보십시오.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손가락질했습니다. 과거가 있는 여자, 일곱 귀신 들렸다고 소문난 여자. 그런 그녀가 어느 날 평생 모은 재산을 쏟아붓습니다. 순금 항아리에 담긴 값비싼 향유, 한 나라 왕의 장례식에나 쓸 법한 그 귀한 것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저 돈이면 가난한 사람을 얼마나 도울 수 있는데, 낭비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향유보다 귀한 존재가 지금 곧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죽음이 자신을 살릴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나무랄 데 없었습니다. 헌금 관리도 그가 맡았고, 늘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꿈꾸던 열심당원 출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결국 은돈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드러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두 사람 다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밑바닥인지 알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겉으로 깨끗해 보이려 애썼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유다가 훨씬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헌신적이고, 도덕적이고, 명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속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빈 자리를 채운 건 결국 "나 자신"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멈춰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저 여인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겉으로 근사한 유다 같은 사람인가? 중요한 건 이것입니다. 유다를 욕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유다가 목숨을 끊은 이유를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끝까지 자기 자존심을 지키려 한 행동이었습니다. "내 죄는 내가 책임진다"며 스스로 심판대에 오른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와 비슷한 순간을 마주합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기보다, 차라리 스스로를 벌하며 자존심의 마지막 조각을 붙드는 쪽을 택할 때가 있습니다.
옛날 방송에서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입니다. 화면 가득 붙은 종이들, "제 아들을 찾습니다. 왼쪽 어깨에 점이 있고, 이름은 아무개입니다." 그런데 그 종이를 보고 아무나 뛰어나와 "제가 그 아들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진짜 그 사람만이 그 글을 보고 심장이 내려앉습니다. "어, 이거 나잖아." 그리고 뛰쳐나옵니다. 이때 그 아버지가 이런 조건을 걸었을까요? "제 아들은 최소한 대학은 나와야 하고, 재산이 얼마 이상 있어야 합니다." 그런 아버지는 없습니다. 자식을 찾는 부모에게 조건이란 없습니다. 그저 얼굴 한 번만 봤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방식이 바로 이렇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갖추어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거지가 되고 만신창이가 된 채로, 그럼에도 그저 "내 아들, 내 딸"이라는 이유 하나로 찾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고, 아버지 앞에 나서기 전에 먼저 스펙을 쌓으려 합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지"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식을 무조건 찾는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는 일입니다.
의학적으로 인공수정은 아직 어느 정도 생식 기능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완전히 폐경이 지난 몸에는 그 어떤 시술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사라의 이야기는 바로 그 "완전히 불가능한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 내가 거들어주마"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는 이미 죽었다. 그 죽음 자리에서 내가 생명을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아주 작은 가능성만 있어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마치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내가 평소에 착하게 살아서"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 작은 가능성마저 완전히 거두어 가십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돼지우리에서 밥도 못 얻어먹을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가진 것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아버지를 진심으로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술렁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아니지요?" 이미 은돈을 받기로 약속한 그 사람, 유다였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 앉아 성경 말씀을 듣고, 찬양을 부르고, 봉사를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저는 아니죠?"라고 되뇌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반면 진짜 성도의 고백은 다릅니다. "제가 그 사람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제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이 고백이 나올 때, 비로소 십자가가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가리키는 지점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어서, 갖추어서, 자격을 얻어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완전히 바닥을 치고, 스스로의 밑바닥을 정직하게 마주할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사라는 끝까지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배신한 사람이었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손가락질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에게서 약속의 생명이 나왔습니다. 반면 겉으로 완벽해 보이려 했던 유다는 결국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정말 붙들어야 할 고백은 이것입니다. "저는 사라였습니다. 하나님을 비웃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유다처럼 늘 제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입니다." 이 고백이 부끄럽고 초라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으시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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