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브리서 10:26~31)
어느 날 밤, 어떤 권사님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기독교 방송이었습니다. 채널을 돌릴 기력도 없어 그냥 두었는데, 밤새 설교가 흘러나왔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목사들, 건강한 교회를 한다고 소문난 설교자들의 목소리가 차례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날이 밝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은 이름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 그분의 보혈, 밤새 들은 설교의 결론은 하나같이 이것이었습니다. "성도답게 착하게 삽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 밤 이후 그 권사님에게 이 질문이 떠나지 않습니다. 도대체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경고한 '언약의 피를 부정하는 죄'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히브리서 10장 26절은 선명한 경고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많은 성도들이 움츠러듭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지었으니, 혹시 나는 속죄를 잃은 것이 아닐까? 이런 불안이 파고듭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만약 여기서 말하는 죄가 구원 이후에도 반복되는 일상의 죄행인 거짓말, 분노, 탐욕 같은 것들을 가리킨다면, 우리 중 누구도 다시 속죄받을 길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이후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모든 성도에게 절망 선고가 됩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의도일 리 없습니다.
본문은 친절하게도 스스로 답을 줍니다. 29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 히브리서가 말하는 죄의 정체는 바로 이것입니다. 언약의 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완성된 구원을 온전히 믿지 않고, 거기에 인간의 무언가를 보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경고하는 '짐짓 범하는 죄'입니다. 죄의 정의를 잘못 잡으면 성경 전체가 뒤틀립니다. 도덕과 윤리의 교과서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복음은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언약의 피'란 무엇입니까? 그 뿌리는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로 수치에 빠진 아담과 하와를 덮기 위해 하나님께서 무죄한 짐승을 잡으셨습니다. 최초의 피 흘림입니다. 인간의 부끄러움을 덮은 것은 짐승의 가죽, 곧 그 죽음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그 언약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준비하라 하십니다. 양과 염소와 비둘기가 쪼개어 놓입니다. 고대 근동의 언약 방식에서 두 당사자는 쪼개진 제물 사이를 함께 걸어 지나갑니다. '이 언약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되겠다'는 자기저주의 맹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5장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브라함은 깊은 잠에 빠지고, 하나님께서 홀로 그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연기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로 상징된 하나님만이 홀로 걸어가십니다.
이것의 의미는 하나입니다. 인간이 이 언약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홀로 책임지십니다. 언약의 양쪽을 모두 하나님이 짊어지신 것입니다. 인간의 실패까지 포함하여, 이 언약은 하나님 혼자 완성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 언약의 실체가 에베소서 1장에서 드러납니다.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작정하셨습니다. 아들의 피로 그들을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하시겠다고. 이것이 역사 이전에 맺어진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창세전 언약의 완성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쪼개진 제물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쪼개지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피는 원죄만 씻은 피가 아닙니다. 자범죄와 원죄를 구별하고, 원죄만 해결했으니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하라는 피가 아닙니다. 성경은 원래 원죄와 자범죄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냥 죄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피는 그 죄 전체를 완전히, 영원히 대속한 피입니다.
어떤 의사가 환자를 수술로 완전히 고쳤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수술은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퇴원하는 환자에게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수술은 제가 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건강을 유지하려면 매일 이것을 먹고, 저것을 하고, 이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술이 소용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환자는 불안합니다. 수술이 완성된 것인지, 자기 노력이 마저 채워야 완성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퇴원 후의 삶은 감사가 아니라 긴장입니다. 혹시 내가 이 규칙을 어기면 수술 효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유지하려면 봉사해야 하고, 헌금해야 하고,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반복됩니다. 그것은 언약의 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수술에 환자의 노력을 보태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이유는 솔직합니다. 예수의 피가 모든 죄를 완전히 대속했다고 선포해버리면, 사람들을 붙들 고리가 사라집니다. 헌금을 강요할 명분이 줄어듭니다. 봉사를 동원할 두려움이 약해집니다. 교회 운영이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늘 무언가를 더 요구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로 사람들을 묶어둡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히브리서가 경고하는 짓입니다. 언약의 피 위에 인간의 희생의 피, 인내의 피, 열심의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지성소에서 그룹들이 언약궤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은, 어떤 피가 뿌려지는지를 지켜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엉뚱한 피가 뿌려진 대제사장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삶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왜 아직 여기 있습니까? 어머니가 아들의 결혼식 날, 오래된 영상들을 꺼내 주셨습니다. 돌 사진, 소풍 영상, 어릴 때 찍힌 크고 작은 순간들, 그것을 쭉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살았구나. 이렇게 울고, 이렇게 넘어지고, 이렇게 부모님께 돌봄을 받아서 지금 여기까지 왔구나.' 그 영상 속의 아이는 스스로 걸음마를 배운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손이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하늘나라에 걸맞은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역사 속에서 내가 얼마나 철저히 실패하는 존재인지를 체험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나를 붙드셨는지를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사랑을 만듭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보좌에 앉혀졌다고 말합니다(엡 2:6). 그 자리는 이 땅에서의 실패로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삶은 그 자리를 쟁취해 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그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를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아버지의 손을 인생의 영상으로 확인해 가는 시간입니다.
율법이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존속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율법은 지켜야 할 도덕 목록이 아닙니다. 율법의 역할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인간은 율법 앞에서 실패할 것입니다. 그 실패를 통해 예수님이 왜 오셔야 했는지를 배우는 것이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은 어떤 모습입니까? 병에 걸리면 아프다고 하십시오. 하나님께 악을 쓰며 "살려달라"고 하십시오.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하나님, 나 돈이 없어요"라고 하십시오. "그래도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현실을 위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식이 다쳐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데 "저는 기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이 아무리 무너져도 말씀은 바뀌지 않습니다. 내 감정이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껴도, 말씀은 우리가 이미 보좌에 앉혀졌다고 합니다. 내 상황이 "이것은 평화가 아니다"라고 말해도, 말씀은 우리가 이미 화평 안에 있다고 합니다. 믿음은 바로 이 싸움입니다. 내 감정이 진리냐, 말씀이 진리냐, 이 싸움에서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현실이 바뀌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바뀌지 않아도 말씀을 믿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죄의 추악함이 체감됩니다. 나만을 위해 살아온 삶이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내장으로 알게 됩니다. 그때 희생이 나오고, 섬김이 나옵니다. 법으로 강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수십 년을 불교에서 지내다가 기독교로 넘어오신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절에서 들은 이야기보다 훨씬 저급한 이야기를 왜 예배당에서 들어야 합니까?" 착하게 살자, 거짓말하지 말자, 이웃을 섬기자, 절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개종해야 합니까? 그분의 물음은 정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교회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빠진 설교는, 어떤 다른 종교의 도덕 강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은 그 복음에 끌리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착하게 살면 좋아합니다. 이웃을 섬기면 칭찬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를 말하는 순간 말합니다. "그것만 빼면 우리가 같이 갈 수 있어." 그 유혹에 넘어간 교회들이, 예수의 이름을 조금씩 지워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빼면 죽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그 보혈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그래서 다르게 설교할 수 없습니다. 이 길이 좁고, 함께 가는 이가 많지 않아도, 방법이 없습니다. 단 한 순간도 그분의 피 없이는 서 있을 수 없는 자이기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을 통해 한 편의 영상을 찍고 계십니다. 넘어진 자리, 실패한 자리, 절망한 자리, 그 모든 곳에 아버지의 손이 있었습니다. 그 영상을 끝에 가서 보게 될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아, 이 모든 곳에서 언약의 피가 나를 붙들고 있었구나. 내 실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내 실패를 통해서, 아버지는 나를 당신의 백성으로 완성해 가고 계셨구나."
새 몸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몸을 치장하는 데 인생을 쏟겠습니까? 예수를 붙드십시오. 언약의 피를 믿으십시오. 그것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1) 그 손은 심판의 손이기 전에, 언약의 피로 우리를 붙드신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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