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11~22)
어느 봄날 오후, 한 사내가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들었습니다. 페이지마다 반듯하게 정렬된 가족사진들, 졸업식 날의 환한 웃음, 교회 봉사 활동에서 찍힌 단체 사진들, 누가 보아도 성실하고 반듯한 삶의 기록이었습니다. 그는 사진을 넘기다 문득 손을 멈췄습니다.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사진 속 인물들은 모두 웃고 있는데, 그 웃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감춰진 분노, 억누른 탐욕, 위장된 교만, 카메라 앞에서만 반듯했던 그 삶의 이면, 그는 사진첩을 덮으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히브리서 9장은 바로 그 질문 앞에 서 있는 인간에게 말을 건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의 원형과 이 땅의 모형을 계속해서 대비시키다가 마침내 22절에 이릅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복음의 핵심이 이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4절에 이런 말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이렇게 읽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마음을 씻어서 더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행실을 교정해 준다는 뜻이 아니라, 행실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그 시도 자체에서 구원해낸다는 뜻입니다. 율법주의라는 감옥에서 끄집어낸다는 말입니다.
에스겔 36장과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을 보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내가 너희 마음을 깨끗하게 해서 착한 행실을 하게 만들겠다"가 아닙니다. "내 영을 너희 속에 두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부어서 마음 자체를 바꾸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완전을 요구하십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야고보도 다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완전의 요구는 겉 행실만이 아닙니다. 마음까지 포함합니다. 뿌리까지 온전해야 완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뿌리, 마음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평생 단정하게 살아온 사람도 깊은 밤 혼자 있을 때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겉은 위장할 수 있어도 마음은 위장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위장되지 않는 마음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행실'이란, 도덕적으로 나쁜 행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모든 종교적 시도가 다 죽은 행실입니다.
서울 어느 골목에 절이 하나 생겼습니다. 현판에는 한자로 된 절 이름이 단정하게 걸려 있고, 문을 열면 향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산속까지 찾아갈 것도 없이, 이제 절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신도들이 모이면 스님은 열심히 보시하고, 방생하고, 착하게 살면 다음 생에 더 좋은 환경으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그 골목을 조금 더 걸으면 교회가 있습니다. 주일이면 사람들이 모여 찬양을 부르고 설교를 듣습니다. 설교가 끝날 무렵 목사는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하고, 성실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다른가요? 이름만 다를 뿐, 구조는 같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쌓아서 하나님 앞에 내미는 것이 보시든 헌금이든, 방생이든 봉사든, 본질은 같습니다. 행위로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 피를 말하지 않으면, 십자가로 모든 설교를 결론짓지 않으면, 아무리 감동적인 설교라도 스님의 설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착하게 잘 살자"로 끝나는 설교는 복음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3장이 경고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무리가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육받고 총명한 사람들이 거기 붙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미혹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설교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언제나 좁은 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교회는 당대에 칭찬받는 교회였습니다. 행실이 바르고, 예배가 단정하고, 사람들의 눈에 건강해 보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나 죽었다." 왜 죽었습니까? 행실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지 않으면 다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은 교회 안에 진짜 산 자가 몇 명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라 하셨습니다. 그 옷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7장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의 피에 빨아 희게 한 세마포 옷입니다. 세상이 살았다 하는 교회는 죽어 있고,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몇 명이 진짜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어느 특정 시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 속 교회 전체에서 반복될 보편적인 현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시대 모든 교회를 향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살았다 하나 죽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이미 아들과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내 아들의 피로 내 백성을 흠 없이 만들겠다." 모든 것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이 언약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피가 없는 상태의 모든 것은 무엇입니까? 흠 있는 것입니다.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죽음은 '없음'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그들은 이 땅에 죽은 자로 왔습니다. 흙인 자로 왔습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행사를 하며 살다가, 무흠한 짐승의 피로 만든 가죽옷으로 부끄러움이 덮이면서 비로소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창세 전 언약을 이 땅의 역사 안에서 설명하는 첫 번째 그림입니다.
사탄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 한 것,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 이 모두는 '없음'이 '있음'의 흉내를 낸 사건입니다. 그것이 죽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게 만들어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율법이라는 것을 얼마나 탐스럽게 여길 것인지를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도덕과 윤리로 어떤 성숙함을 이루어내면 칭찬이 쏟아집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는 없음이 맞습니다"를 인정하며 가는 자입니다. 나의 성숙함과 있음의 증거를 쌓아 하나님 앞에 내미는 자가 아닙니다.
어느 순교자 이야기입니다. 2세기의 감독 폴리캅은 노구를 이끌고 화형대 앞에 섰습니다. 관리들이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폴리캅은 대답했습니다. "팔십 년이 넘도록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배신하지 않으셨소. 내가 어찌 이 마지막 순간에 그분을 배신하겠소. 어서 불을 붙이시오." 그는 서두르라고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했습니다. 베드로는 내일 참수당할 상황에서 감옥 안에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겟세마네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떠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때 하늘이 열린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흑암이 임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육신에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은 하나님의 사망의 저주를 담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담아낼 수 없는 사망을 예수님이 몸소 담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로 폴리캅이, 스데반이, 베드로가 죽음 앞에서도 하늘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이 육신은 반드시 죽어야 할 것임이 십자가에서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성화론은 이 버려진 육신을 갖고 무언가를 이루어내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버려지신 바로 그 육신에서 성숙의 열매를 거두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육에 버려지신 것은, 육에 버려진 우리를 건져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말기암 투병 중이었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습니다. 온몸에 암이 퍼져 단 한 순간도 아프지 않은 때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왜 이렇게 하나님이 원망스럽죠?"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오랫동안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오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분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뼛속까지 다 들추어 내시는 분이네요.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죽는 순간까지 드러내시는 분이네요." 그것이 신앙입니다.
한 달 전만 해도 그분은 자신이 이런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고통이 오니 뼛속에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나는 언제든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이 죽는 순간까지 폭로당하면서, "하나님이 창세 전에 언약 안 하셨으면 나 어떡할 뻔 했나요"를 고백하고 가는 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몰랐던 나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는 그 자리에서, 그래도 그분의 손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22절의 '거의'는 헬라어로 '스케돈'입니다. 율법 안에서 피흘림 없이도 정결케 되는 경우가 간혹 있었습니다. 소제가 그 예입니다. 그러나 소제도 번제와 함께 드려집니다. 잘게 부수어진 곡식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수어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모형입니다.
이 땅의 모형 안에는 그런 예외적 형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실체는 하나입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습니다. 이 말은 단지 죄를 용서받으려면 속죄의 제사가 필요하다는 종교적 원리가 아닙니다. 그 너머를 말합니다. 예수의 피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존재일 수 없습니다. 흥부와 놀부의 권선징악처럼, 착한 사람이 용서받고 나쁜 사람이 벌받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피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구석구석 비추는 MRI입니다. 설마 내가 아니겠지 했던 것들이 죄로 드러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비열할 줄 몰랐던 것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집니다. 그때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죄를 자기가 책임지려 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고 고백했지만, 그 죄를 스스로 갚으려 목을 맸습니다. 성화론이 극단으로 흐르면 거기 닿게 됩니다. 내 죄는 내가 책임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무너집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시나이다."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자인지 알면서도, 그래도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사랑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면목없이, 그래도 그분이 내미는 손을 꼭 잡는 것입니다. 뻔뻔스럽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실체를 드러낼 때 절망하여 목을 매는 것이 아니라, 그 처절한 폭로가 오히려 창세 전 언약의 확인이 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것은 죄인을 위협하는 말이 아닙니다. '없음'인 우리가 '있음'이 되는 단 하나의 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그 길이 없습니다. 성숙도, 봉사도, 헌신도 그 길이 아닙니다. 오직 피만이 우리를 존재이게 합니다. 그 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면목없이, 그러나 담대히, 그 손을 잡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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