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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말씀 묵상

율법에서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피 - 손으로 짓지 않은 집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15.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브리서 9:11~15)

어린 시절,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논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손바닥 위에 올라오는 그 작은 금속 모형은 실제 자동차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빨간 차체에 네 개의 바퀴, 심지어 문도 열립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 핸들을 돌려도 어디엔가 달려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진짜를 가리키는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진짜가 있기에 모형이 의미를 갖는 것이지, 모형이 진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성전 이야기가 정확히 이것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웅장한 성전, 돌과 금과 향나무로 쌓아올린 그 건물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입니다. 그것은 모형입니다. 원형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손으로 짓지 아니한,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곳에 있습니다. 이 창조 이전에, 이 세계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 그것이 원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모형의 세계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인 성전도, 제사도, 제도도, 심지어 우리의 일상도 그 원형을 향해 손가락을 들고 있는 모형인 것입니다. 모형이 원형보다 더 실재할 수는 없습니다. 모형에서 아무리 열심히 무언가를 쌓아도, 그것이 원형을 만들어낼 수는 없늕것입니다.

성경에는 두 개의 계단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바벨탑의 계단이고, 다른 하나는 야곱의 사닥다리입니다. 놀랍게도 이 두 계단은 히브리어로 동일한 단어입니다.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성전의 계단도 같은 단어입니다. 성경은 이 세 개의 계단을 의도적으로 같은 언어로 묶어 놓았습니다.

바벨탑의 계단을 떠올려보십시오. 시날 평지에 모인 사람들이 말합니다.
"역청과 벽돌로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자. 우리의 이름을 내고, 우리가 흩어지지 않게 하자." 방향은 아래에서 위로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재료를 모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기어오르려는 시도입니다. 벽돌 하나를 올릴 때마다 그들은 더 가까워진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반면 야곱의 사닥다리는 방향이 다릅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야곱은 빈털터리로 광야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완전한 실패의 자리에서 꿈을 꿉니다. 계단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옵니다. 하나님이 그 계단을 타고 내려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방향은 위에서 아래로입니다. 인간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이것은 선언입니다. 그 사닥다리가, 하늘과 땅을 잇는 그 계단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자신이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설교는 너무나 자주 방향을 거꾸로 놓습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라. 더 헌신하라. 성화의 계단을 한 단 한 단 올라가라." 이 언어는 아름답게 들리지만, 구조는 바벨탑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인간의 역청과 벽돌로 하나님께 기어오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이 구조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두 가지 피를 비교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가 육체를 정결하게 하거든,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겠느냐." 구약의 제사는 육체를 정결하게 했습니다. 제사장이 피를 뿌리면, 의식적으로 부정했던 사람이 다시 공동체 안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정결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깨끗해지는 것, 공동체의 기준을 통과하는 것, 종교적 요건을 충족하는 것. 이것이 육체의 정결입니다.

오늘날로 옮기면, 이것은 도덕적 반듯함입니다. 거짓말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고, 이웃에게 친절하고, 교회에 빠지지 않고, 헌금을 성실히 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흠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핵심은 이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본질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육체의 깨끗함으로는 이 율법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다른 곳을 씻습니다. 양심입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그 내면의 공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죽은 행실"로부터 씻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죽은 행실"은 단순히 나쁜 행동이 아닙니다.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모든 시도, 무언가를 쌓아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그 근원적 충동, 그것이 "죽은 행실"입니다. 예수의 피는 그 충동의 뿌리를 건드립니다.

어떤 성도가 매일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습니다. 주일에는 봉사에 헌신하고, 연말이면 가장 먼저 감사헌금 봉투를 냅니다. 그의 삶은 반듯합니다. 그런데 그 반듯함의 뿌리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다"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내 아이의 대학 입시, 사업의 번창, 건강의 회복, 혹은 더 고상하게는, 구원의 확신, 천국의 보장, 이것이 율법의 구조입니다.
"지키면 복을 주겠다."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을 아시기에 그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행위와 보상의 관계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의 언어가 복음의 자리를 차지하면, 신앙은 거래가 됩니다. 나의 행위로 하나님의 복을 사들이는 거래 말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이 거래에서 죽는 것입니다. 내 열심으로, 내 도덕으로, 내 수고로 얻어낼 수 있는 복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구원조차 내가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 그것 역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 구원, 내 천국"이라는 말 자체가 여전히 율법의 언어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천국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아직 거래의 언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천국과 내 구원을 위한 투자가 아닙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그 나를 사랑하신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없어도 그분이 사랑스럽고, 구원이 확정되지 않아도 그분 앞에 서고 싶어야 합니다.

어느 날 오후, 어떤 사람이 아이들과 블루마블 게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짜 돈으로 땅을 사고, 빌딩을 세우고, 상대방의 재산을 빼앗는 게임입니다. 하찮은 가짜 돈 앞에서도 손이 떨리고 눈이 충혈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사람보다 훨씬 능숙하게 게임을 했습니다. 나라 하나씩을 통째로 사들이고, 빌딩을 몇 채씩 세우고, 결국 그는 완전한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게임이 끝나고 나서야 보였습니다. 이긴 아이들이 그 가짜 돈 묶음을 손에 쥐고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게임판은 접히고, 플라스틱 빌딩들은 상자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 아이들은 자기가 땄다는 것을 어디에다 가져갈 수가 없었습니다. 고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집이 없었습니다.

그는 졌습니다. 빈털터리로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따뜻한 방이 있는 집이, 그 날 저녁 따뜻한 밥을 지어놓고 기다리는 부모님이 계신 집이 있었습니다. 게임판 위의 승패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탁탁 털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이 블루마블 게임이라면, 그리고 성경은 정확히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이 게임판 위에서 더 많은 땅을, 더 큰 빌딩을, 더 많은 돈을 쌓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물질적 번영만이 아닙니다. 내 도덕적 성취, 내 영적 진보, 내 신앙의 성숙, 이것도 게임판 위에서 쌓는 것이라면 파장 후에 들고 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 있습니다. 이 창조에 속하지 않은, 손으로 짓지 않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그 집 말입니다. 그 집을 알면 이 땅에서의 소유와 명예와 평판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게임판에서 지는 것이 두렵지 않아집니다. 탁탁 털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부릅니다. 왜 새로운 것입니까? 첫 언약은 조건이 있었습니다. "지키면 복을 주겠다." 조건이 있는 언약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언약의 성패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첫 언약은 항상 인간의 실패로 끝났습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새 언약은 다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첫 언약의 모든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조건을 채우는 주체가 바뀐 것입니다. 인간이 채워야 했던 자리에 그리스도가 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성취 안으로 부르심을 받아 들어갑니다.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제사장이 해마다 짐승의 피를 들고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그 반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신호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단번에", 이 한 단어가 모든 것을 말합니다. 반복이 필요 없을 만큼 완전하게,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쌓아올려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착하고 따뜻하게 사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이 복음은 불편힌ㅂ니다. 욕심 없이, 가진 것을 나누며, 다투지 않고, 남을 위해 사는 삶, 이것이 기독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불편함을 외면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야말로 복음을 진지하게 붙드는 시작점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천국이 없어도 예수가 사랑스러운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이 땅에 잠깐 왔다 가는, 흙으로 빚어진,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뼛속까지 실감하고 있는가?

그것은 골수와 관절을 쪼개는 말씀 앞에 서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강연도, 도덕적 교훈도, 인생 이야기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말씀이,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그 말씀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 믿음은 반드시 우리를 고민하게 합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고민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종교 행위로 추락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늘에 이미 완성된 아버지의 집을 바라보며, 이 모형의 세상에서 그분만을 붙들기를,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 그 완전한 속죄 위에 서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계단을 쌓지 않아도 됩니다. 계단은 하늘에서 이미 내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