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브리서 7:11~19)
히브리서 기자는 집요할 정도로 율법을 흔듭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 아론의 반차, 시내산의 율법, 제사의 반복성…. 마치 하나씩 하나씩 해체하듯 무너뜨립니다. 요즘 사람들의 귀에는 이런 메시지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율법은 무익하다”, “사람은 온전해질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은 자존심을 건드리고,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해석은 성경을 이렇게 비틀어 읽습니다. “그래도 결국 성경은 우리에게 희망을 말하지 않는가?” “그래도 인간은 꽤 괜찮은 존재라는 메시지를 줘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히브리서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합니다. 히브리서의 관심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오직 한 분, 참된 제사장에게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은 두 제사장직을 대비시킵니다. 아론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입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은 분명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 직분으로는 온전함을 얻을 수 없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실체가 아니라 모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면, 땅 위에 그림자가 함께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비행기가 아닙니다. 실체는 하나뿐입니다. 아론의 제사장직은 진짜 제사장 되실 분을 설명하기 위한 그림자였습니다. 그리고 실체가 도착한 순간, 그림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제사 직분이 바뀌었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율법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그 역할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묵시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묵시는 ‘차근차근 발전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묵시는 하나님께서 단번에 완료하신 세계입니다. 창조를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먼저 만드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만일 인간의 도움이 필요했다면 첫날부터 인간을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반복은 미완성의 감탄이 아니라, “이 창조는 내가 완료한다”는 선언입니다. 이 완성된 묵시의 세계가 그림자를 드리워 시간 속에 펼쳐진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묵시는 수직적으로 완료된 세계이고, 역사는 수평적인 그림자로 펼쳐진 세계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 곧 예수 그리스도는 묵시의 실체이십니다. 아론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들은 역사 속에 드리워진 그림자일 뿐입니다.
율법은 설명이었고, 은혜는 실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보이는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장면을 보십시오. 왜 굳이 산 위였을까요? 왜 구름으로 가리셨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인간은 구름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름 위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사이의 창세 전 언약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언약은 율법이라는 보이는 언어로 내려옵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구원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므로 실체가 오면, 설명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말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모든 것을 보이는 것 안에서 이해하려 합니다. "결과는 원인에서 나온다. 변화는 노력에서 나온다. 구원은 성숙에서 나온다." 이 사고방식의 극단이 바로 진화론과 유물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예수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설명하는 무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묵시 위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무엇인가를 확인하려 듭니다. 개혁, 변화, 성숙, 업적, 헌신, 그러나 인간의 성숙은 결코 구원의 증거가 아닙니다. 역사는 이미 수없이 증명했습니다. 사람들이 존경하던 인물들, 청빈과 헌신의 상징 같던 이들이 시간이 지나 드러난 실체는 전혀 달랐습니다. 왜 그런가요?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인물들의 치부를 숨기지 않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본받으라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의지하지 말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은 사울을 늘 “창을 쥔 자”로 묘사합니다. 한문으로 ‘자아(自我)’는 손에 창을 쥔 형상입니다. 자아란 무엇인가?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가라앉은 이유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무겁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가라앉습니다. 그 가라앉음이 곧 지옥입니다. 구원은 자아를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고 죽은 사람만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에 하나만 알면 됩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것입니다. “주여, 당신이 기억해 주지 않으시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고백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율법과 제사, 성막과 제단을 끝없이 비교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눈을 들어 실체를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만 붙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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