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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젖을 먹는 신앙, 안식을 모르는 삶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4.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브리서 5:11~14)

사람들은 흔히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
신앙의 어린아이에 머물지 말고 장성한 성도가 되자.” 그래서 자연스럽게 결론도 이렇게 내려집니다. 더 열심히 배우고, 더 헌신하고, 더 성숙해지자. 하지만 히브리서 5장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이 말씀이 그런 종류의 격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본문은 우리를 응원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전하는 경고입니다. “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문제는 지식의 양이 아닙니다. 공부를 덜 해서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너희는 들을 수 없는 상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배워야 할 처지다” 여기서 말하는 ‘초보’는 큐티 방법이나 성경 개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 그분의 피로 단번에 완성된 구속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이 복음에서 점점 멀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울며 나왔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래도 난 이 정도는 한다”가 됩니다. 처음에는 “은혜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매달렸는데, 나중에는 “이만하면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가 됩니다. 그때 우리는 이미 젖을 먹는 어른이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여기서 ‘경험하지 못했다’는 말은 ‘조금밖에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혀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진 의, 내가 쌓아 올린 모든 종교적 성취를 무너뜨리는 복음입니다.

이 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비교하지 않아도 되고, 위에 서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모르면, 사람은 반드시 자기 의로 살아야만 합니다. 착함으로, 헌신으로, 도덕으로, 봉사로, 신앙 연차로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
너희는 아직 어린아이다.” 그 말은 곧, “너희는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안식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은 태어나자마자 안식일을 맞았습니다. 일해서 안식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안식 안에서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안식을 싫어했습니다. 너무 피동적이었기 때문입니다. “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왜 모든 것이 주어지는가?”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안식을 만들어내려 했습니다. 이것이 죄의 시작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말합니다. “
열심히 살면 편해진다.” “잘 믿으면 행복해진다.” “성공하면 쉼이 온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공부할수록 머리는 쉬지 못하고, 돈이 많을수록 불안은 커지고, 성과가 쌓일수록 내려놓지 못합니다. 사람은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 쉴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의 “
말씀을 행하라”는 구절은 가장 많이 오해된 말씀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서 뭘 하면 됩니까?” 그러나 야고보가 말한 ‘행함’은 내가 말씀을 실천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 말은 말씀이 나를 장악해 끌고 가는 상태입니다. 말씀은 먼저 나를 드러냅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없음이다.” “너는 죽은 자다.” 그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다시 자기 의로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는 것, 그것이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물질적 선행으로만 이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돌봄은 시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아와 과부는 세상에서 가장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변명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을 도덕으로 재단하지 않고, 원인 분석으로 설명하지 않고, 비교 우위로 내려다보지 않는 것입니다. “
당신이 나보다 낫습니다.” 이 고백이 나오는 자리, 그 자리가 십자가 아래인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습니다. 그것은 헌금 이야기가 아닙니다. “
네가 전쟁에서 얻은 모든 것, 이긴 것조차 네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것은 떡과 포도주뿐이었습니다. 그것은 훗날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내어주실 몸과 피의 그림자였습니다. 구원은 내가 싸워서 얻은 전리품이 아니라 그분이 죽어서 건네준 선물입니다.

성숙이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이란 내가 끝까지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점점 더 선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다시 십자가로 돌아갑니다. “
나는 죽은 자입니다.” “나는 없음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만이 전부입니다.” 그 자리에서만 사람은 지옥에 대한 공포에서도, 자기 증명이라는 강박에서도 자유로워집니다.

나는 지금 젖을 먹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가? 나는 여전히 무엇으로 나를 증명하려 하는가? 오늘도 예수만 붙들고 안식에 머무는 하루이기를 조용히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