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브리서 5:5~8)
히브리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한 인물 앞으로 데려갑니다. 그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던 종교적 권위자나 도덕적 모범으로서의 대제사장이 아닙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대제사장은, 인간의 연약을 몸소 껴안고,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던 그 자리에서 출발합니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이 말은 제사장의 자격이 탁월함이 아니라 연약함임을 드러냅니다. 대제사장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서 세워진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도 속죄받아야 할 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 모든 제사장 제도의 끝에서, 우리를 단 한 분에게로 이끕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참 대제사장입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신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부르심을 받으셨고, 순종하셨으며,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 아들이셨지만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왜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배워야’ 했는가? 왜 말씀이신 분이, 인간의 역사라는 시간을 통과하셨는가?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위함입니다. 믿음이란, 돕는 것이 아니라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을 ‘내가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로 측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의 존재 전체를 의뢰하고 의존하는 것입니다. “아빠만 믿어!”라는 아이의 말처럼, 그 믿음에는 조건도, 보탬도 없습니다. 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붙드는 순간, 그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걷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붙들고 있기 때문에 걷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무엇을 더 보태려 들 때, 오히려 그 신뢰는 깨집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숙제를 대신 완성하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 그림에 손을 대지 않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나의 색’을 찍어 넣는 순간, 우리는 다시 자기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성숙을 성과의 누적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오늘 조금 더 나아졌고, 내일 더 발전했으니 하나님께 가까워졌다는 식의 계산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숙이란 이것입니다. “하나님, 은혜가 아니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고백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 그것이 변화요 성숙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낫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계단 위로 올려놓기 위한 장치가 아닙니다. 율법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폭로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아흔아홉 개를 지켰든, 두 개를 지켰든, 하나를 어기면 모두 어긴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상대적 우수성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율법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하게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율법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말씀이 오셔서 하신 일은 분명합니다. “너희는 모두 어둠이다. 회개하라.” 그러나 인간은 그 말씀 앞에서도 여전히 자기 가치를 챙기려 합니다. 회개 대신 변명을, 은혜 대신 공로를, 십자가 대신 자랑을 붙듭니다. 그래서 복음은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자로 출발합니다. “너희는 이미 못 박혔다.” 그 선언 위에서만 참된 생명이 시작됩니다.
다윗과 베드로, 그리고 우리의 진짜 자리
다윗은 원수를 두 번 살려준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무고한 자를 죽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다윗의 위대함이 아니라, “나는 이런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곧 같은 입으로 예수를 저주했습니다. 이것은 성숙의 실패가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고백을 칭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네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앙의 고백과 변화는, 우리가 성취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의 흔적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꿈꾸는 신앙이 왜 마귀적일까요? 가룟 유다는 열심당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인간의 힘으로 이루고자 했습니다. 더 정의로운 나라, 더 평등한 나라,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인간 중심의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움직이지 않자, 그는 예수를 팔았습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근거로 한 하나님 나라의 꿈이 바로 마귀의 전략인 것입니다. 교회가 윤리적으로 훌륭해지는 것, 청렴해지는 것, 나눔을 실천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 나을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가 내놓아야 할 열매는 이것입니다.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은 숨 쉬는 것조차 죄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나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없음의 자리에서, 대제사장 앞으로 이 역사는 우리에게 진보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결정된 사실을 반복해서 가르쳐 주기 위한 무대인 것입니다.
우리는 없음의 자리에서 있음이 된 자들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결판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갈 길은 분명합니다. 자기를 증명하려는 자리에서 내려와, 대제사장 예수께서 계신 시은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상도, 개근상도, 인정도 필요 없습니다.
모든 찬송은 하나님께만 속해 있습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 그 은혜 하나로 오늘도 살아갑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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