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브리서 4:9~11)
히브리서 4장은 읽을수록 고개가 갸웃해지는 장입니다.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또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미 들어간 건가요? 아직 안 들어간 건가요? 힘쓰면 들어가는 건가요? 힘썼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건가요?
많은 성도가 이 구절에서 멈칫합니다. 그래서 그냥 ‘어려우니까 넘어가자’ 하고 지나가거나, 표면적인 도덕·윤리 교훈으로 바꿔서 듣고 맙니다. 이 틈을 이단들이 파고듭니다. 성경을 꿰뚫는 것 같아 보이는 말, 체험담과 기적을 곁들이고, “이렇게 해야 진짜 성령 받고, 진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하고 속삭이면, 십 년 동안 교회 다녔던 사람도 기웃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의 실체와 문맥을 모르면 ‘그럴듯한 말’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관점을 줍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은 단순히 “편하다, 고생 끝, 천국 간다.” 이런 수준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체를 보이는 역사와 사건으로 설명하는 책입니다. 창조는 “보이지 않는 실체”의 모형입니다. 광야는 “인간의 불신·불순종”이라는 실체를 보여주는 모델하우스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의 그림자입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로 “장차 올 참된 쉼”의 예표입니다.
보이지 않는 완성된 실체(예수와 그분의 나라)를 우리 같은 연약한 인간이 이해하도록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작은 모델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은 말합니다. “모든 것은 예수로 말미암고, 예수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이 세상은 목적 없이 만들어진 무대가 아닙니다. 예수의 필요성과 구속의 깊이를 설명하기 위해 마련된 시간과 공간입니다.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끊임없이 광야세대를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눈앞에서 보고도 끝까지 불평하고, 의심하고,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문제는 ‘도덕성’이나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마음, 하나님의 주권보다 자기 경험을 믿는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그 마음 때문에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이야기를 끌어오며 말합니다. “보라, 믿음과 순종이 없는 자는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안식은 도덕적인 성실함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붙드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또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 모순처럼 보이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성경의 ‘이미–아직’의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가 있습니다. ‘실체를 맛본 자들’입니다. 구약 역사 가운데,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쉼을 누렸던 ‘일부’가 있었습니다. 또한 신약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적 안식의 실체를 맛보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죄 문제를 끝내주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내 죄를 해결하기 위한 종교적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이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끝까지 붙드는 삶’입니다. 이미 은혜를 맛보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의 습성, 의심, 자기주장, 세상 욕망과 싸웁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 ‘힘쓴다’는 것은 열심히 수련해서 점수를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공로 쌓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지 않도록, 끝까지 믿음과 순종을 붙드는 것입니다. 즉, 기도로 하나님께 묶여 있는 삶, 말씀을 통해 자신을 깨뜨리는 삶, 자기 욕망과 자아를 내려놓는 순종, 은혜가 “은혜 되게” 하는 결단, 이것이 바로 “힘씀”입니다.
여기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내가 열심히 하면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능력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끝까지 놓치지 않도록 붙드는 결단은 우리의 몫입니다. 은혜와 순종은 싸우는 관계가 아니라, 한 몸처럼 맞붙어 있는 관계입니다. 은혜가 먼저 오고, 그 은혜가 순종을 낳고, 순종이 다시 은혜를 누리게 합니다. 이 순환이 깨지면, 광야세대처럼 ‘불순종의 본’에 빠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흔드는 이단적 흐름은 쉬운 말, 감정적 말, 체험 같은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길은 오직 말씀과 순종뿐입니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혼자 판단하지 않고, 건강한 공동체와 지도자에게 검증을 구하고, 은혜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 어떤 초능력보다, 어떤 표적보다 더 큰 능력입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의 삶은 첫째, 하나님의 뜻을 삶의 중심에 둡니다. 세상을 해석하는 기준이 내 경험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둘째, 기도가 생활의 숨결처럼 흐릅니다. 하나님 없이 결정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셋째, 말씀 앞에서 겸손합니다. 체험보다 성경을 더 신뢰합니다. 넷째, 작은 순종을 실천합니다. 거창한 의로움보다, 오늘의 작은 순종을 쌓아 갑니다. 다섯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점검합니다. 혼자서 판단하지 않고, 말씀의 검증을 받으며 걸어갑니다. 이것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안식은 이미 우리에게 왔고, 우리는 지금 그 안식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은 우리를 혼란케 하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초대입니다. “이미 안식은 너희에게 왔다. 그러니 그 안식의 실체를 놓치지 말고 끝까지 붙들라.”
우리가 붙드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은혜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은혜를 매일 누릴 때, 우리는 이미 안식 가운데 살며, 또한 완전한 안식으로 걸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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