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브리서 3:15~19)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3장은 이 한 문장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선물을 주셨고, 그 ‘오늘’ 속에서 다시 그분의 음성을 들을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은 마음이 굳어졌고, 결국 광야에서 시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왔음에도 결국 약속의 땅,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이유를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말합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죄의 유혹은 ‘못된 행동’이 아니라, 믿음의 시작을 잊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를 도덕적 탈선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3장의 문맥은 그것보다 훨씬 본질적인 문제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막살면 안 된다”는 식의 경고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죄를 “우리가 시작할 때 붙들었던 확신을 놓아버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시작했던 확신은 무엇이었나요? 바로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출애굽의 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무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노예였고, 연약했고,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단 한 가지, 피를 믿음으로 바르는 것입니다. 그 단순한 신뢰가 그들을 살렸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그 확신은 희미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해야 할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단순한 은혜’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광야를 헤맵니다. “내가 뭘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충분히 잘하면 더 큰 복을 받지 않을까?" “하나님도 뭔가 보상을 주시지 않겠어?” 이 질문들의 뿌리는 하나입니다. 은혜보다 나를 더 믿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죄의 유혹인 것입니다.
상급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 땅의 이익을 더 원합니다. 천국에서의 상급을 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상 받겠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기대는 대부분 이 땅에서 당겨 받으려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이만큼 봉사했으니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시겠지, 내가 이 정도 헌신했으니 하나님이 내 자녀에게 복을 주시겠지, 내가 잘하면 하나님도 나에게 좋은 길을 열어주겠지." 이 사고는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의 탈을 쓴 거래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계산이 아닙니다. 순종이라는 히브리어 자체가 ‘완전함’을 포함합니다. 완전한 순종은 ‘완전한 비움’에서만 나옵니다. 내 의지, 내 계산, 내 이름, 내 손에 쥔 것을 비워낼 때 그 자리에 하나님만 남을 때 그때 비로소 순종이 됩니다. 그 상태를 성경은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은 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우고 하나님께 의존하게 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가 ‘위로’와 ‘격려’를 해주기만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주시는 위로는 언제나 죄의 드러남을 통과한 뒤에 옵니다. 말씀은 우리의 숨은 죄성을 드러내고 나의 의를 깨뜨리고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칼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 앞에서는 누구도 체면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 말씀은 때로 회중을 불편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를 꾸미지 않습니다. 벗겨냅니다. 허위의 옷을, 종교적 포장을, 자기 의의 갑옷을 모두 벗겨냅니다. 벗겨져야 예수가 입혀집니다. 죽어야 부활합니다. 무너져야 다시 세워집니다.
어느 목회자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다른 지역의 어떤 목회자가 자신의 설교를 비난하며 위협까지 했지만, 결국 말씀을 듣고 무너져 회개했다고 합니다. 하룻밤에 설교 스무 편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잘못 가르쳤는지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한 사람의 변화가 앞으로 수천 명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말씀은 그렇게 합니다. 사람을 뒤흔들고, 생각을 전환시키고, 삶을 뒤집어놓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찢지만 동시에 살립니다. 죄를 폭로하지만 동시에 은혜를 부어줍니다. 광야에서 만나는 진리의 말씀은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을 지나야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어느 90세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 바르게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죽기 직전까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울부짖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은 죄를 많이 지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본질을 정확히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의가 줄어들수록 더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자신을 의롭게 느낄수록 오히려 더 굳어집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꺾일 때 그때만 선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히브리서가 반복하는 말은 오늘입니다. 오늘 너희가 들을 수 있다면, 오늘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오늘 순종할 수 있다면, 그 ‘오늘’이 모여 평생의 믿음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이라는 선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처음 믿었던 단순함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의 그 단순한 신뢰, “그 피만 믿으면 산다”는 초대, 그 기억을 자꾸 불러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을 훈련하십시오. 순종은 의무 수행이 아닙니다. 전적 의존입니다. 비움입니다. 또한, 말씀 앞에서 숨지 마십시오. 말씀이 내 죄를 드러낼 때, 그것을 은혜의 통로로 받으십시오. 그 순간이 바로 ‘오늘’입니다. 마지막으로 일상의 작은 섬김으로 믿음을 확인하십시오. 의무감이 아니라 은혜의 열매로 흘러나올 때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약속의 땅은 ‘잘한 사람’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실패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합니다. 너무 많은 의를 쌓으려 하고, 너무 많은 계산을 하고, 너무 많은 보상을 바라면서 정작 믿음을 놓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다시 묻습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붙들고 사느냐? 너의 행위냐, 아니면 어린양의 피냐?"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오늘이라는 은혜를 붙드십시오. 오늘 다시 믿음을 붙드십시오. 오늘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그 길 끝에 있는 것은 광야가 아니라 안식, 하나님이 준비하신 약속의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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