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히브리서 3:12)
우리는 종종 히브리서 3장을 읽을 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광야에서 죽은 출애굽 1세대는 다 지옥 간 걸까?” 그렇게 묻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어느새 말씀의 초점을 놓칩니다. 성경은 그들의 결말을 따져 묻는 교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는가가 핵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누가 지옥 갔는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약속보다 현실을 더 크게 보는 마음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보다 자기 생각을 더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큰 불신앙인지를 말입니다.
히브리서 3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성경에서 “오늘”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하루의 날짜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이끌겠다. 내가 너를 붙들겠다. 내가 책임진다. 그러니 내 약속을 놓지 말아라.”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자주 완고해집니다. 왜냐하면 눈앞의 현실이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광야에서 그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게 정말 죄 때문일까? 출애굽 1세대는 거의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죄가 많아서 지옥 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나타났습니다. 아론도, 미리암도, 요셉의 자손들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을 지옥 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 중에는 믿음의 사람도 있었고, 불신앙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운명이 아니라 교훈을 말합니다. “그들이 왜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는가?” 성경의 결론은 단 하나입니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였느니라.”(3:19) 그들을 판단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보라는 말입니다.
광야 세대가 하나님을 분노하게 했던 이유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인 실패”가 아닙니다. 그들의 죄는 이것이었습니다. 첫번째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 믿는 마음입니다.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탐꾼의 말은 달랐습니다. “거기는 거인들이 살아요. 우린 메뚜기만도 못해요.” 하나님의 약속보다 현실의 크기를 더 크게 본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을 ‘내 삶에 도움 주는 분’ 정도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아버지”가 아니라 “삶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존재” 정도로 취급되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고 하나님은 보조자처럼 밀려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 사건의 반복입니다. “나는 나의 주인이다”라는 선언하는 것을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세번째는 자기 중심의 신앙인 인본주의적 신앙의 함정입니다. 광야 세대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비슷한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더 성숙했지?” “내가 얼마나 더 착해졌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사람이 되었을까?” 이런 질문은 언뜻 신앙 같지만 사실은 출발점이 ‘나’입니다. 신앙의 중심이 내가 된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광야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인간은 변화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더욱 은혜입니다. 우리는 종종 “변화된 인격”을 신앙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인격은 언제든지 흔들립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말년에 치매를 앓으셨습니다. 찬송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던 분이 어느 날 권사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야 이년아, 아직도 예수를 믿냐? 그런 건 꺼!” 그분의 인격이 무너진 것이지, 그분의 믿음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할머니도 죽기 직전 천국 이야기를 해도 멍하니 바라보셨습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그동안 믿어 온 건 뭐였을까? 그 순간의 모습이 그분의 믿음의 전부였을까?”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의 인격은 병이 오면 무너지고 육신은 약해지면 흔들리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이 이뤄내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왜 들어갔는가?그들의 인격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말씀만 주시면 우리가 가서 다 죽여버리겠습니다.” 온유합니까? 사랑이 넘칩니까? 인품이 개발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평생을 보낸 거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들어갔습니다. 왜입니까?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격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아들을 붙들라. 너 자신의 힘을 붙들지 말라.” 히브리서 기자는 경고하지만 그 경고는 위협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으로, 하나님의 품 안으로 부르는 초대입니다.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십시오.” 너 자신을 붙들지 마십시오.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너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으십시오.” 너를 붙들고 있는 분을 놓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이 아니라 더 깊은 신뢰입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자녀다. 내가 너를 끝까지 책임진다. 나의 약속을 놓지 마라. 너의 상황보다 내 아들의 피를 더 크게 보아라.” 오늘, 이 음성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붙드시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이미 안식에 들어가 있습니다.
주님, 내 판단이 주님의 약속보다 앞서지 않게 하시고 내 현실이 주님의 말씀보다 크지 않게 하소서. 내게 있는 변화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붙들게 하시며,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주님의 음성에 ‘예, 주님’ 하고 응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히브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0) | 2025.11.16 |
|---|---|
| 우리는 그의 집이라 (0) | 2025.11.06 |
| 죽음을 이기신 생명 -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0) | 2025.10.29 |
|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완성 (0) | 2025.10.22 |
| 아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0) | 2025.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