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브리서 2:10~14)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창시자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직함이 아니라 구원의 시간표 전체를 아우르는 선언입니다. 구원은 그분에게서 시작되어 그분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완성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더 나아가 그 완성의 방식이 “고난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신앙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흔듭니다. 구원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성과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구원의 창시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구원의 주체이며 동시에 그 목적을 이룬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묻습니다. “무엇이 이미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는가?” 구원은 예수의 사람됨과 사역, 특히 십자가와 부활로 시작되어 이미 완결된 신적 사건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 사건에 참여하며 그 은혜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시작되고’ ‘완성된’ 사건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완성된 은혜를 신뢰하고 머리 되신 예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라는 표현은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온전함’은 예수의 인격적 성숙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메시아로서의 사역의 완결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아신 바 참된 메시아, 곧 구원의 완수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단순한 불행으로 두지 않으시고 구원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고난도 단순한 좌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 우리 안의 옛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십니다.
히브리서 2장은 예수와 성도가 “한 근원”에서 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와 예수 사이의 질적 연합을 말합니다. 예수는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형제’라 부르십니다. 형제가 된다는 것은 동일한 피, 동일한 구속의 토대 위에 서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예수의 피가 우리를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개인의 도덕적 성취들의 집합’이 아니라, 한 몸된 연합체입니다. 각 지체는 머리(예수)에게 붙어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
요한복음의 ‘참 포도나무’ 비유와 연결하면, 예수께 붙어 있는 가지는 ‘말씀으로 깨끗하게 된 자’이며 그 결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가 말하는 열매는 ‘행위의 숫자’나 ‘도덕적 성공’이 아닙니다. 궁극적 열매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입니다. “아,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구나. 주님이 주님이시구나.”라는 고백이 삶의 첫 자리와 마지막 자리를 차지할 때, 우리의 일과 말과 고난과 기쁨이 모두 하나님께 찬송이 됩니다. 선행 자체를 목표로 삼는 성화주의는 은혜의 근원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선행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지, 구원의 근거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은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지니시고 죽음으로써 죽음의 권세, 곧 마귀를 멸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놀랍도록 역설적입니다. 승리는 죽음(자기부인) 안에 있습니다. 예수의 승리는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로 확정되었고, 그 승리에 참여하는 자는 동일한 방식으로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을 얻습니다. 성도의 이김은 자기 주장과 자존심을 지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자리에서 비로소 참된 생명이 드러납니다.
실제 삶의 적용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머리에 붙어 있기: 매일 말씀과 기도로 예수에게 붙어 있으려 노력하세요. 분리된 열매는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난을 재해석하기: 고난을 받을 때 ‘내가 실패했구나’로 끝내지 말고 ‘주께서 나를 연단하시는구나’로 받아들이십시오. 셋째, 찬송하는 삶 연습: 감사와 찬송의 고백을 의식적으로 훈련하세요. 작은 일에도 “주님, 감사합니다”로 시작하는 습관이 영적 열매를 만듭니다. 넷째, 겸손한 연대: 교회는 서로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나눌 때 치유됩니다. 형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 예수의 마음을 닮아 서로를 돌보십시오. 다섯째, 자기 의의 포기: 사회적 명예나 자기 증명의 욕구로 신앙을 대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예수의 공로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무가치함, 실패, 신앙의 건조함은 대부분 ‘예수의 완성된 구원’의 현실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 모든 의문을 덮고 넘는 확증입니다. 동시에 이 진리는 우리를 도전합니다. 죽음(자기부인)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죽음은 고통스럽지만, 그 죽음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창조적 도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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