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태복음 5:1)
예수님이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산은 단순히 높은 언덕이 아니었습니다. 그 산은 시내산과 마주 서 있는 또 하나의 산, 율법의 산을 부수는 복음의 산이었습니다. 옛날 시내산에서는 모세가 율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산은 “하라”의 산이었습니다. 인간의 의무, 인간의 행위, 인간의 자격을 요구하는 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께서 오르신 산은 전혀 다른 성격을 띱니다. 그 산에서는 “다 이루었다”는 복음이 선포됩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분, 인간의 행위 대신 자신의 순종으로 모든 의를 이루신 분이 서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산상수훈은 윤리 교훈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산상수훈을 “그리스도인의 윤리 강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라, 온유하라, 긍휼히 여기라, 마음을 청결히 하라.” 이 말씀들을 마치 도덕 교과서의 덕목처럼 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덕 교사가 아니라 구속자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윤리적 이상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 아래 죽은 인간을 살리기 위한 생명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행위의 기준으로 삼으면, 결국 사람은 두 가지 길 중 하나로 빠집니다. 자기 의에 빠지거나, 절망 속에 주저앉거나, 둘 다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의를 더 세우러 오신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러 오셨습니다. 시내산에서 만들어진 인간의 의는 그분 앞에서 산산이 부서집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더 높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종말, 그리고 은혜의 시작입니다.
시내산은 “조건적 복”의 산입니다. “하면 살리라”는 산입니다. 갈릴리 산은 “무조건적 복”의 산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산입니다. 시내산은 인간의 의를 세우지만, 갈릴리 산은 그 의를 무너뜨립니다. 시내산에서는 돌판에 글자가 새겨졌지만, 갈릴리 산에서는 성령이 마음판에 은혜를 새기십니다.
시내산은 번개와 불로 가득했지만, 갈릴리 산에는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의 음성이 울립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 말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자기 의를 완전히 잃은 자, 시내산에서 깨어진 자에게만 들려오는 복음입니다. 그 복은 “이제 너는 율법으로가 아니라, 나의 은혜로 산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의 윤리가 아니라 천국의 본질입니다. 예수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시며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무리들은 놀라며 몰려왔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병이 낫는 나라, 문제 해결의 나라”로만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잠시 떠나 제자들만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천국은 육적인 번영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천국은 어떤 나라의 제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임하신 사건입니다. 천국은 인간이 올라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나라입니다. 인간이 애써 닿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침노해 들어오시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마태복음 전체의 구조는 놀랍게도 출애굽 사건을 닮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듯, 예수님도 애굽에서 나오십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율법의 산에 이르렀듯, 예수님도 광야 시험을 통과해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새 언약의 산, 곧 은혜의 시온산에 서 계십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잃어버릴 수 있는 시내산이 아니라, 하늘의 시온산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더 이상 “하라”의 하나님이 아니라, “다 이루었다”의 하나님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산 위에서 우리는 두려움 대신 안식을 얻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는 이상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의 명령으로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이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라헬이 통곡하며 자기 자식을 위로받지 못합니다. 이 끔찍한 사건 속에 구속의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하나님은 이 사건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다 죽어야 한다.”
그런데 그 죽음의 한가운데서 오직 한 아들만 살아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참 이스라엘, 새 아담, 새 언약의 시작이십니다. 라헬의 통곡은 비극이 아니라, 은혜의 새벽이었습니다. 옛 언약의 아들들은 죽고, 새 언약의 아들이 살아남았습니다. 율법은 죽고, 복음이 태어났습니다. 그분 안에서 죽음은 끝나고,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도덕적으로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의가 완전히 무너진 사람, 시내산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더 이상 내세울 행위도, 붙잡을 공로도 없습니다. 그저 예수의 은혜만이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 자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임하는 나라입니다.
산상수훈은 율법을 강화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세우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천국은 내가 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침노하셔서, 내 옛 자아인 애굽, 율법, 자기 의를 깨뜨리십니다. 라헬의 통곡은 은혜의 서곡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고, 율법이 무너지지 않으면 복음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시내산으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갈릴리 산, 은혜의 산으로 부르십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더 이상 “해야 한다”는 두려움 속에 서 있지 않습니다. “이미 다 이루었다”는 선언 속에서 안식합니다.
산상수훈은 윤리의 교훈이 아니라 복음의 노래입니다. 그것은 무너짐 속에서 시작되는 새 창조의 노래, 율법이 끝나고 은혜가 시작되는 산 위의 복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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