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 줄 아노라.” (사도행전 3:17)
이 말씀은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난 사건 후, 군중에게 설교하며 한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다”는 말로, 인간의 무지와 죄,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 있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앉은뱅이는 인간의 실존을 상징합니다. 그는 성전 미문(‘아름다운 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문은 하나님의 임재 앞 문턱까지 왔지만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인간의 현실을 드러냅니다. “세상은 아름답다”, “살 만하다”는 허상 속에서, 인간은 여전히 성전 문 앞에서 동냥만 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걸을 수도, 스스로 구원받을 수도 없는 절대 무능의 상태가 죄 아래 놓인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동냥 그릇만 바라보던 자에게 베드로는 ‘나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세상의 은과 금으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너를 일으킬 수 있다.”는 복음의 핵심 선언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명령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이 인간 안으로 실제화되는 사건입니다. 앉은뱅이의 발과 발목이 곧바로 힘을 얻었다는 것은,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고, 죽음의 세포에 생명이 스며드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치유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이 땅에 침투한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5장의 38년 된 병자와 같이, 인간은 "누가 나를 도와주기만 하면" 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심으로, 그의 신앙의 초점을 ‘물에 들어가는 행위’에서 ‘예수 자신’으로 옮기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전적 무능’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은혜가 임합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와 복음주의의 갈림길입니다.
구원의 본질은 ‘제자리에 돌아감’입니다. 구원은 단순히 죄 사함이나 천국행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 속에서 제자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죄는 제 자리를 떠난 상태, 구원은 다시 제 자리에 서는 상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왕좌로 복귀하신 것”이 구원의 첫 열매이며, 그분 안에 있는 우리 또한 그 여정을 따라갑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비전’과 ‘의지’가 부서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 자리를 무너뜨리고 참된 자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을 고쳐보겠다는 인간 중심의 이상주의, 혹은 “하나님을 도와 세상을 밝히겠다”는 구원관은 인본주의이며 복음의 왜곡입니다. 참된 성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 뒤에 숨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배우는 자입니다. 성도의 선행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내 안의 예수께서 사시는 결과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점점 나아지는 도덕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나를 신뢰하지 않게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담배 하나도 내 의지로 끊을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자기부인의 신앙이며, “내 안에 사는 이는 그리스도시라”(갈 2:20)의 체험입니다.
앉은뱅이는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의 육체적 회복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회복의 모형이었습니다. 그가 “미문 앞”에 있던 자에서 “성전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우리 또한 은혜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살아갑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말씀은 곧, “너의 무능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으라.”는 복음의 초대입니다.
사도행전 3장은 단순한 기적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다리가 회복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전체가 구원으로 일어서는 우주적 사건의 모형입니다. 성전 미문 앞,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은 곧 우리 자신입니다.
그는 날마다 “성전 미문”이라 불리는 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성전 문은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 앞에서 동냥을 구하며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문턱 앞에 서 있지만, 결코 스스로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문’이라 부를 만큼 화려합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의 문 앞에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한 채 앉아 있는 인간의 비참함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누군가 나를 도와주기만 하면” 그렇게 희망을 말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성전 미문 앞의 그 사람처럼, 우리도 인생의 미문 앞에 앉아 ‘하나님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허상 속에서 동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던 길에 그를 보았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 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보라.” 그의 시선은 처음엔 ‘은과 금’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세상의 동냥 그릇에서 그의 눈을 들어 하늘의 구원자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 말 한마디는 인간의 전 존재를 흔드는 창조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혼돈 가운데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을 때처럼, 죽음과 무능의 자리에서 새 창조의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그의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의 몸 속에 부활의 생명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모형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정지에서 회복으로, 문 앞에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여정, 그것이 복음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연못가에서 늘 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누가 나를 도와 물속에 넣어주면 내가 낫겠습니다.” 얼마나 익숙한 신앙입니까. ‘누가 나를 좀 도와주면 좋겠다’, ‘조금만 환경이 나아지면’, ‘내가 좀 더 신앙적으로 성장하면...’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신앙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의 시선을 ‘도와줄 사람’에서 ‘예수 자신’으로 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능성을 이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가능성을 부수고, 전적 무능의 자리에 서게 하십니다. 그때에야 전적인 은혜가 임합니다. 구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자”가 될 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시작됩니다.
죄란 ‘제 자리를 떠난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리, 그분의 임재 안에서 누리던 생명의 자리를 떠난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단지 죄 사함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리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앉은뱅이는 오랫동안 땅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기의 본래 자리, 하나님께 예배하는 존재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하늘로 승천하셔서 보좌로 돌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 안에서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운 꿈과 계획을 무너뜨리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분이 무너뜨리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문 앞에 앉은뱅이로 머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자”, “우리가 세상을 밝히자”고 외칩니다. 물론 그 말은 아름답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중심의 구원관으로 흐를 때, 복음은 인본주의로 변질됩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 세상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바꾸는 혁명가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 뒤에 숨어 하나님의 나라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의 선행은 자기 의지의 결실이 아니라, 그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입니다.
진짜 신앙은 점점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점점 나 자신을 신뢰하지 않게 되는 길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담배 하나도, 습관 하나도, 의지로 끊을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복음은 능력이 됩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그 순간, 나는 여전히 약하지만, 그분이 나를 일으키십니다.
앉은뱅이는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문 앞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킵니다. 죄와 절망, 무능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존재로 말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말씀은 단지 병든 다리를 향한 명령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향한 초대입니다. “너의 무능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으라.” 그때 우리는 마침내 ‘성전 미문 앞의 사람’에서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사람’으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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