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브리서 5:12~14)
히브리서 5장 6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은 단순히 “신앙이 어린 상태에 머물지 말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존재인지, 그리고 그 중심이 어떻게 끝까지 폭로되어야만 참된 구원이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히브리서 전체의 문맥, 더 나아가 성경 전체의 흐름을 함께 떠올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왜 쓰러졌는지를 반복해서 상기시킵니다. 그 이유는 불순종 때문이었고, 그 불순종의 실체는 믿지 않음이었습니다. 단순히 명령 몇 개를 어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금송아지 사건을 떠올려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지 사십 일이 지나서야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장면을 보며 “왜 그렇게 빨리 배신했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의 실체가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신 것처럼 보입니다.
사십 일은 에덴동산의 선악과 앞에 서 있는 시간과도 같습니다. 인간의 의지와 결단, 열심은 일정 시간 동안은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드러납니다. 인간의 열심은 결국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보이지 않자 불안해졌고, 결국 금을 내놓습니다. 겉으로 보면 헌신처럼 보이지만, 그 헌신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우리를 대신해 줄 신을 만들어 달라.” 사도 바울은 우상의 실체를 한 단어로 탐심이라고 말합니다. 탐심은 단지 남의 것을 탐하는 욕심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모든 ‘원함’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를 행하려는 모든 시도,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도 같은 단어를 쓰신다는 점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같은 ‘원함’이지만, 인간에게서 나올 때는 우상이 되고, 예수에게서 나올 때는 구원이 됩니다.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키십니다. 아브라함이 318명의 가솔을 데리고 다섯 나라 연합군을 쫓아간 사건, 기드온의 300용사, 다윗과 골리앗, 이 전쟁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런 전쟁을 허락하실까요? “이 전쟁은 너희의 전쟁이 아니다.” 승리의 주체가 인간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사람이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부모도 족보도 없는 살렘 왕, 평강의 왕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내어줍니다. 이것은 분명한 상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것은 단순한 헌금 행위가 아니라,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할 자리에 누군가가 대신 서 계셨다”는 고백입니다.
십일조의 본질은 항상 대속의 인정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은 아무런 물질적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떡과 포도주, 그리고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내가 네 상급이다.”
히브리서 5장은 예수님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바뀌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리에서 순종이 무엇인지를 끝까지 통과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망은 죄 없는 존재를 삼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망은 모든 인간을 덥석 물어왔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씹어보니 죄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망은 예수를 토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 안에 붙잡혀 있던 모든 포로들이 함께 끌려 나왔습니다. 이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올라가는 사건이 아니라, 예수께서 끌어올리시는 사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너희는 아직도 젖을 먹어야 할 자들이다.” 젖을 먹는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여전히 내가 중심에 서 있는 신앙입니다. 말씀조차 나를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상태입니다. 단단한 음식은 지식의 양이 아닙니다. 단단한 음식은 분별력입니다. 선과 악을 나누는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오는 모든 원함이 얼마나 쉽게 우상이 되는지를 알아차리는 눈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은 점점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힘이 빠져가는 신앙입니다. 옛날보다 더 연약해졌다고 느껴지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힘이 남아 있을 때는 절대로 진짜 순종이 나오지 않습니다. 힘이 빠질 때, 그때 비로소 은혜가 은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신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연약함의 고백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을 온전히 짊어진 고백이었습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점 잘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이런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 제가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성숙의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5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젖을 먹고 있는가, 아니면 단단한 음식을 먹고 있는가? 그 대답은 단 하나로 드러납니다. 예수만 남았는가, 아직도 내가 남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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