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린도전서 6:9~11)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옛날보다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나? 예전보다는 덜 화내고, 덜 욕하고, 덜 실수하는데….”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개선된 점수표’를 보고 고개를 끄덕여 주실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6장을 펼쳐보면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어서 불의의 목록을 더합니다. 음행, 우상 숭배, 간음, 남색, 도적질, 탐욕, 술 취함, 모욕, 속여 빼앗음….
우리는 이 중 하나라도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요?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니더라도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욕망과 두려움, 불평, 비교, 교만, 판단…. 이것들을 “탐심”이라는 단어 하나로 성경은 묶어버립니다. 그리고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냥 마음속으로 조금 원했을 뿐인데요.”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성경은 이렇게 답합니다. “너 자신을 중심으로 원하는 것, 너라는 자아를 지키고 높이려는 모든 생각은 탐심이다.” 이 말을 듣고 나면 누가 이 목록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죽는 날까지 인간은 “나”를 붙들고 죽습니다. 임종 직전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 자신의 두려움, 자신의 자녀 걱정을 붙들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나 중심성’을 죄의 본질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 없는 존재 아닌가요? 성경은 불의한 자는 못 들어간다 했고, 우리는 모두 불의의 목록 속에 들어 있는 존재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또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안에 임하였느니라.”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 나라는 불의한 자를 거부한다 했는데, 불의한 내가 어떻게 그 하나님 나라를 “이미” 안에 품고 있을 수 있을까요?
성경이 말하는 ‘불의한 자’는 남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서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과거형처럼 보이지만 원문적으로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한 존재들이고, 앞으로도 본질은 그렇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다만,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불의한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가 우리에게 의로움을 ‘입혀주셨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나아졌기 때문에’ 받아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불의한 자’임에도, 예수의 공로를 우리 위에 덮어씌우셨기 때문에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 때문에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성경은 윤리 교과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무능을 폭로하는 거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삶의 규칙서’ 정도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렇게 해야 하고, 그래서 가능한 한 착하고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 사실 이런 접근은 흔하고,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서 끝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목적은 우리에게 명령을 지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 앞에서 결국 못 지키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이 말씀들은 인간을 ‘포기시키기 위한’ 말씀입니다. 포기란 실패의 포기가 아니라 ‘내 힘으로는 안 되니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포기입니다. 우리의 도덕적 개선은 하나님께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옛날보다 조금 나아졌다는 건 ‘나의 변화에 대한 자랑’일 뿐이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몇 가지 품행의 개선이 아니라 우리 ‘전체’입니다. 내 선함, 내 의지, 내 노력, 내 도덕심, 그 모든 ‘나의 의’를 내려놓은 채 “하나님, 저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의만 붙듭니다.” 라고 고백하는 인간을 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킨 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옷 입은 자에게 주어집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도덕적 점수표가 높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하나님 나라엔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의. 우리는 그 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씻음도, 거룩함도, 의롭다 하심도 모두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는 자가 된 이유는 우리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한 의를 이루신 예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도들끼리 서로 고소하고 송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가장 분노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너희 중에 잘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죄인이요, 모두가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무슨 자격으로 서로를 판단하고 저울질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면 판단할 것이 많아 보입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왜 저렇게 부족할까, 왜 변화가 없을까…. 하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너나 그 사람이나 본질은 똑같다. 둘 다 예수의 피가 아니면 아무 소망 없는 자들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용서할 수 있고, 양보할 수 있고, 참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먼저 용서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전히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의 욕망을 품고 나의 불안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의가 내게 입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착한 자들의 회당’이 아니라 ‘은혜 입은 자들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내가 조금 나아졌다는 착각에 기대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붙듭니다. 그분이 나의 의이고, 나의 자랑이고, 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나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계와 묵시 - 죽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1) | 2025.12.22 |
|---|---|
| 영계와 묵시 - 생과 사, 사라짐이 아닌 옮겨짐 (0) | 2025.12.22 |
| 하나님나라 - 누구도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0) | 2025.12.03 |
| 영원 전 언약(창세전 언약) (0) | 2025.12.02 |
| 천국 소망이 지금을 견디게 한다 (0) | 2025.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