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린도후서 5:8)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법은 보았지만, 죽는 일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죽음은 언제나 두려움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늙을 때까지의 삶은 비교적 잘 알고 있으나,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간과 그 이후에 대해서는 상상과 추측에 의존할 뿐입니다. 그 경계선 너머의 세계는 오직 이미 그곳을 통과한 자들만이 아는 영역인 것입니다.
썬다 씽의 묵시 속에서 묘사되는 이 장면은, 바로 그 죽음 이후의 세계를 엿보게 합니다. 그는 홀로 기도하던 중, 영안이 열려 수많은 천사와 성도들 가운데 엎드려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그들의 영광스럽고 빛나는 얼굴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의 눈빛과 태도 속에 가득한 동정과 사랑을 보며 마음 깊은 평안을 경험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비교와 정죄가 아니라, 사랑과 환대가 먼저 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늘 평가받고, 서열화되고,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에서 성도는 성도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같은 은혜를 입은 자로서 서로를 알아보고 품습니다.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잠듦’입니다.
썬다 씽이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무슨 일이 생기며, 죽은 뒤에 영혼의 상태는 어떠한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죽음은 잠과 같다는 것입니다. 몹시 피곤한 사람이 깊이 잠들 듯, 육체의 기능이 서서히 멈추고 의식은 졸음처럼 흐려집니다. 특별한 사고나 극심한 고통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죽음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극도의 고통이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조차 즉시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예화와 같습니다. 긴 여행 끝에 기차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풍경은 바뀌었고 공기는 다르지만, 고통의 기억은 없습니다. 다만 “여기가 어디지?” 하는 낯섦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혼들은 처음에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이 세상의 또 다른 나라나 새로운 장소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가르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아, 내가 육체의 세계를 떠나 영의 세계로 옮겨 왔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평온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계에 대한 준비와 이해 없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영혼들은 큰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 채, 낮고 어두운 중간 상태에 머물며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방황한합니다. 이러한 상태의 영혼들이 때로는 이 땅의 사람들을 괴롭게 하기도 한다고 묘사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나 괴롭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성질, 같은 욕망, 같은 어둠을 마음에 품고 자유의지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병균이 아무 몸에나 침투하지 못하고, 면역이 약한 몸에만 작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보호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명하여 그의 백성과 피조물을 지키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악령의 활동은 철저히 제한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의인조차 해할 수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사탄이 성도를 시험하고 박해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욥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파괴를 위한 허락이 아니라, 연단을 위한 허락입니다. 신자에게 임하는 환란은 궁극적으로 손해가 아니라 유익이 됩니다. 마치 금이 불 속에서 정련되듯, 믿음은 고난을 통과하며 더욱 순수해집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은 영원한 영광을 준비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묵시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대비되는 장면은 불신자의 죽음과 신자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살아온 많은 불신자들은 죽음의 순간 무지각 상태에 빠지지만, 곧 자신을 둘러싼 사납고 무서운 존재들을 보고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두려움에 마비됩니다.
반면, 신자의 죽음은 전혀 다릅니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오는 천사들과 거룩한 영들을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먼저 죽은 사랑하는 이들이 그의 임종에 함께하며, 그 영혼을 영계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마음 깊은 평안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낯선 장소가 아니라, 이 땅에서 믿고 기도하며 오래도록 바라던 참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타지에서 유학하던 자녀가 긴 세월 후 고향 집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과 같습니다. 풍경은 새로울지라도, 마음은 “드디어 집에 왔다”는 안도감으로 가득 찹니다.
모든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영혼을 지상에서 영계로 인도하는 것은 천사의 직무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영계에서 항상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각 영혼의 성숙도와 영광의 정도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더 분명하게, 어떤 이에게는 더 은은하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친히 임종의 자리에 오셔서, 그의 종의 눈물을 씻기시고 낙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장면은 참으로 위로가 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공기와 빛과 젖과 품이 준비되어 있듯이, 영혼이 영의 세계로 들어갈 때도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더 밝은 아침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언제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세계를 향해 살고 있는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자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문이 아니라, 사랑과 평안이 기다리는 귀향의 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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