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8)
우리는 흔히 이 세상을 “현실”이라 부릅니다.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고,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고후 4:18). 썬다 싱이 증언한 ‘영의 세계’에 대한 묵상은 바로 이 성경적 선언을 마음 깊이 흔들어 깨웁니다. 그가 성도들과 나눈 대화 속에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어떤 영으로 살았는가가 곧 영원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엄중한 진리가 흐르고 있습니다.
죽음은 이동이지 소멸이 아닙니다. 썬다 싱의 증언에서 가장 먼저 강조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거처의 이동입니다. 사람은 죽는 즉시 ‘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곳은 무질서한 혼돈의 공간이 아니라, 이 땅에서 형성된 영적 성향이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누구와 함께 살아왔는지, 무엇을 사랑했는지, 무엇에 귀를 기울였는지가 더 이상 숨겨지지 않습니다.
선한 영혼은 선한 영들과 함께, 악한 영혼은 악한 영들과 함께 있게 됩니다. 이는 상벌 이전의 문제라기보다, 본성이 찾아간 자기 자리에 가깝습니다. 마치 빛을 사랑한 자가 빛으로 나아가고, 어둠을 사랑한 자가 어둠을 피난처 삼는 것과 같습니다(요 3:19).
썬다 싱은 ‘빛의 아들들’, 곧 선한 영혼들이 영의 세계에 들어올 때 경험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투명하고 맑은 대양과 같은 곳에서 목욕하듯 새로워집니다. 물에 빠지지도, 젖지도 않지만, 모든 더러움은 사라지고 영혼은 가볍고 순수해집니다. 이 장면은 상징적입니다. 이는 행위의 공로가 아니라,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경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계 7:14)에 대해 말합니다. 빛의 세계는 스스로 깨끗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공간이 아니라, 깨끗하게 씻김 받은 자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사랑하는 주님 앞에 서며, 수많은 성도와 천사들과 더불어 친밀한 교제를 누립니다. 이 땅에서의 신앙은 종종 외롭고 고단했지만, 그 외로움은 영원한 공동체 안에서 완전히 회복됩니다.
반대로 악한 생애를 산 자들의 모습은 처참합니다. 그들은 빛을 견디지 못합니다. 빛은 그들을 정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더 낮고 더 어두운 곳으로 몸을 던집니다. 그곳에는 검은 연기와 통회의 울음, 끊이지 않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외부에서 강제로 부과된 형벌이라기보다, 자기중심적 삶의 필연적 결과처럼 보입니다.
주목할 점은, 그 곁에도 천사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령들이 마음대로 파괴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질서한 폭력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지로 꺾지도 않으십니다. 이것이 심판의 무서움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공정하시되, 우리가 선택한 길을 존중하십니다.
아이의 죽음에 대한 장면은 가장 깊은 위로를 줍니다. 한 어린아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 영혼을 데려갑니다. 그 돌봄과 사랑은 이 땅의 어떤 어머니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완전합니다. 천사들의 말은 특히 인상 깊습니다. “어머니는 잠시 슬퍼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만날 것이다.” 아이의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상실처럼 보이지만, 영원의 관점에서는 잠깐의 이별입니다.
그 아이는 천국에서 자라며, 하늘의 지식을 배우고, 마침내 천사와 같은 존재로 성숙합니다. 그리고 훗날 어머니를 맞이합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이 땅의 시간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죽음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그러나 영원을 기준으로 보면, 죽음은 완성으로 들어가는 문이 됩니다.
독일의 한 철학자는 영계의 영광을 보았음에도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 모든 것을 증명하려는 태도 때문입니다. 그는 본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말합니다. “여기서는 두뇌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 장면은 지식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지식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않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철학자는 결국 ‘중간 상태’의 낮은 곳에서 오랜 방황을 겪으며,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회개에 이른 뒤에야 빛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지식이 구원의 문이 될 수도, 장벽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썬다 싱은 어떤 의미에서 온 우주는 하나님의 현재로 충만한 영계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이 세상 역시 영계입니다. 우리는 몸을 입고 있을 뿐, 본질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 들어가는 ‘영의 세계’는 중간 상태입니다. 최종적 영광과 최종적 심판 사이의 영역입니다. 그곳에서도 영혼은 멈춰 있지 않고, 자기 성향에 따라 더 빛으로, 혹은 더 어둠으로 나아갑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 모든 이야기는 죽은 뒤의 세계를 호기심으로 탐구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분명한 메시지를 줍니다. 영의 세계는 죽은 뒤에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미 형성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어떤 빛을 피하고 어떤 어둠을 익숙해하는지가 곧 영원의 방향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삶은 가볍지 않습니다. 오늘의 선택은 영원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참 생명을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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