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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하나님나라 - 누구도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2. 3.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9:57~62)

길을 걷던 예수님 앞에 세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
주님, 제가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단 한 번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 사람 모두를 거절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정말 주님은 따르겠다는 사람들을 그렇게 매정하게 밀어내시는 분일까요? 아니면 이 말씀 안에 우리가 보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 들어 있을까요?

첫 번째 사람은 ‘
열심’으로 따르려는 사람입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따르겠습니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 박수를 받고, 주님도 “그래, 잘 왔다!”라고 칭찬하실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이 말은 이렇게 들립니다. “너는 나를 따를 수 없다. 너는 나와 같은 길을 갈 수 없다.

왜일까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인간의 열심이나 결단으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
주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마음조차 우리 속의 숨겨진 자아, 자기 의, 자기 확신에서 나오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이런 열심을 경계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열심이 결국 나를 드러내고, “내가 따랐다”는 자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
조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장례 좀 치르고 오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 정당한 이유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정도는 허락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고 항의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이 장례의 가치를 낮게 보신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는 항상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이것만 정리하고…”, “이것만 끝내고…
라는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
먼저’가 없는 나라, 하나님이 ‘먼저’가 되는 나라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
타협’을 찾는 사람입니다. “주여, 제가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가족과 작별 인사만 하고 오게 하소서.” 듣기에 너무 자연스러운 요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런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아직 미련이 남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 말은 “뒤돌아보지 마라”는 율법적 명령이 아닙니다. 누구도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세 사람 중 ‘합격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
세 사람 모두를’ 거절하셨는가?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이 본문은 “제자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지침이 아니라 “너희는 아무도 나를 따라올 수 없다”는 폭로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예수를 따를 능력이 없습니다. 열심에서도, 조건에서도, 의지에서도 복음은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변화산 사건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
이전에는 귀신을 쫓아냈는데, 왜 이번에는 실패했을까?” 그들의 착각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능력이 자기 안에 내재한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즉, “너희가 사용하는 믿음은 너희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작은 믿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감지되지 않는 믿음,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 오직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 믿음은 산을 바다에 던집니다. 여기서 산은 시온산, 율법의 산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율법의 저주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길을 평평하게 만드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능력이 드러나는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가 드러나는 믿음입니다.

변화산 사건 직후, 제자들은 말합니다. “
누가 더 큰 자냐?” 예수님이 조금만 더 있으면 정치적 왕으로 등극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때 우의정은 누구고 영의정은 누구냐는 어린아이 같은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다.” “나는 섬기러 왔다.” 즉, 하나님 나라의 높음은 세상에서의 낮아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에서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 하는 말은 세상식 승진이나 보상의 개념이 아니라 더 낮은 자리, 더 큰 섬김의 자리에 놓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상을 ‘
보상’, ‘승진’, ‘명예’로 해석합니다. 그 해석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와 거꾸로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것은 결단이나 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수련회에서 손 들고 “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외친다고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심으실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내 뜨거움이 아니라 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나를 붙잡을 때 나는 비로소 뒤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로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내가 예수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나를 붙잡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높아지는 사람, 더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라 더 낮아지고, 더 숨고, 더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교회 역시 세상 앞에서 “
잘난 공동체”가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완벽한 사람을 부르지 않습니다. 복음은 예수밖에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