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도니야와 그와 함께 한 손님들이 먹기를 마칠 때에 다 들은지라 요압이 뿔나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어찌하여 성읍 중에서 소리가 요란하냐"(열왕기상 1:41)
이 이야기는 열왕기상 1장에 기록된 사건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두 번째 왕 다윗의 말년에 벌어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궁중 암투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이스라엘 역사, 신정 왕정 체제,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과정 속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왜 저 소리가 나는 것이지?" 잔칫집이었고, 아도니야는 의기양양했습니다. 스스로 왕이 되기로 마음먹은 그는 군대 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 유력자들의 지지를 얻어 다윗 왕이 아직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 했습니다. 그에게는 능력도 있었고, 외모도 뛰어났으며, 기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를 책망하는 일도 당장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왕은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놓쳤습니다.
아도니야의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마음의 거울입니다. 우리도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려 합니다. 누가 우리를 세우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왕좌를 꿈꿉니다. 하나님의 계획도, 뜻도 기다리지 않습니다. 기회가 보이면 잡고, 사람의 지지가 있으면 그 길이 옳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 앞에서 자신이 주인 되려는 모든 시도는 반역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조용하고 지혜롭게 포장되었어도, 하나님 없이 세운 왕국은 모래성일 뿐입니다.
요압이 들은 그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서 참된 왕을 세우시는 신호였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이었고, 그 위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습니다. 요압의 귀에 들린 소리는 아도니야의 계획이 무너졌음을 알리는 심판의 나팔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만든 질서는 나팔 소리 하나에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때가 오면, 그분의 뜻이 드러나면, 사람의 모든 계략과 권모술수는 하룻밤 꿈처럼 사라집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보다 눈에 띄지 않았고, 정치적 기반도 약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워진 왕이었습니다. 그의 출생 자체가 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간음과 살인 속에서 태어난 그의 어머니 밧세바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선택의 주권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준과 다르게 일하십니다. 강한 자를 택하지 않으시고, 준비된 자를 찾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뜻 안에서, 자신의 시간을 따라, 자신의 방법으로 왕을 세우십니다.
이 열왕기상 1장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왕의 노쇠함과 그를 둘러싼 권력 암투가 아닙니다. 여기엔 인간 본성, 죄의 속성,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반대편에서 움직이는 인간 왕국의 실상이 아주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잔치요, 축제요, 성공의 순간입니다. 아도니아가 주최한 이 잔치는 명분도 있고, 세력도 있고, 추종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빠졌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빠졌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솔로몬이 빠졌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나단 선지자가 빠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성이 빚어내는 신앙의 형식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은 모시지 않으면서, '왕 되기를 원하는 인간'은 잔치를 벌입니다. 교회를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그 잔치 속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빠져있는데도 불구하고, “주여 주여” 하며 즐거워하는 그 자리 말입니다.
아도니아의 잔치는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이 이야기는 고대 이스라엘 궁정의 권력 싸움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왕좌를 누가 차지하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도니아는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일어납니다. 그런데 본문은 말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한 번도 그에게 ‘어찌하여 그러느냐’ 하고 책망하지 아니하였더라.”(왕상1:6)
다윗은 이 아들의 교만과 왕권 찬탈의 욕망을 미리 막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왕이신 예수님을 등지고 ‘나 스스로 왕 되겠다’는 마음을 한 번도 책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도니아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와 가정과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왕좌 쟁탈전’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말씀 속에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지되지 않는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귀에, 손에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지 가능한 무언가를 찾습니다. 기적, 현상, 감정, 경험, 신비, 성공, 확신 등, 이런 것들로 하나님을 대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으로 감지되는 분입니다. 믿음이란 그분을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그분의 뜻에 반응하는 것이고, 자기 왕됨을 포기하는 결단입니다.
아도니아가 왕이 되겠다고 나설 때, 모든 조건이 그에게 유리하게 보입니다. 요압, 아비아달 같은 믿음직한 사람들이 도와줍니다. 잔치가 열리고, 백성들이 그를 환호합니다. 세상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밧세바를 통해, 다윗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왕좌는 아도니아의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것이다.” 왕권은 인간의 손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얼마나 많은 아도니아의 잔치로 가득합니까? 예수가 빠져있고, 말씀은 묻혀있고, 대신 인기와 성공과 동조와 숫자만 있습니다. 나단과 사독과 솔로몬은 초대받지 않은 잔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잔치를 누가 벌이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입니다. 내가 왕이 되기를 원하고, 내가 높아지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이 잔치를 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잔치를 끝내십니다. 진짜 왕,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면, 가짜 왕의 잔치는 소리 없이 무너집니다. 요압이 듣는 그 ‘나팔 소리’가 바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순간입니다.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사독은 참된 제사장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어떤 잔치에 초대받고 있습니까? 사람이 벌이는, 나를 왕으로 세우는 잔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보내신 왕을 높이는 기름부음의 현장입니까? 우리 안의 왕좌를 다시 점검하십시오. 예수께서 그 자리에 계십니까? 아니면 아도니아가 앉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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