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사무엘상 5:1~5)
이스라엘이 전쟁에 패하자 꾀를 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워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체로 신뢰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오히려 블레셋에게 더 큰 패배를 당하고, 법궤마저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이방신에게 수모를 당하시는 것을 허락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참담한 신앙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궤를 가진 블레셋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궤를 다곤 신상 옆, 말하자면 선반 한 켠에 조용히 ‘보관’해 두었습니다. 필요할 때 써먹을 만한 신들 중 하나로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 오만한 행위를 두 차례의 신적 개입으로 무너뜨리셨습니다. 다곤은 궤 앞에서 엎드러졌고, 결국 머리와 두 손이 부서져 나뒹굴었습니다.
이 본문은 이방인 블레셋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처하는 우리 자신에게 더욱 심각한 경고입니다. 이스라엘처럼, 교회는 오늘도 하나님을 방법과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유혹 앞에 서 있습니다. 기복주의 신앙인 하나님의 뜻보다 복 받기를 원하며, 종교적 의무주의로 하나님께 뭔가 드리면 복을 받는 식의 계약관계로,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응급신’처럼 여기는 명절신앙, 이벤트신앙의 모습을 보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하나님은 종종 “선반 위의 하나님”이 됩니다. 예배는 형식적이고, 하나님은 삶의 구석에 밀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대우를 받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주권자이십니다. 모든 무릎이 꿇고, 모든 혀가 고백해야 할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절대로 나누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곤 신상 앞에 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곤을 쓰러뜨리셨습니다. 이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다곤들을 하나씩 무너뜨리십니다. 인본주의 철학, 무신론적 과학, 공산주의 유토피아, 자율적 도덕성, 자기계발적 성화, 하나님 없이 “잘 살아보자”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마치 타이타닉처럼 빙산 하나에 산산조각 납니다.
고린도후서 5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신학적 통찰을 줍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라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고후 5:4) 벗는다는 것은 내가 내 힘으로 의롭고 거룩하게 되려는 자율적 도덕의 시도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벗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덧입는 자입니다. 자기 의를 벗고, 하나님의 의로 덧입는 것이 진정한 성화입니다.
선반 위에 놓인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도구가 아닙니다. 필요할 때 부르면 등장하는 마법의 법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경배받으실 분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다곤과 함께 놓여진 하나님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을 “필요할 때 쓰는 선반 위의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분은 오직 주로 섬김을 받으셔야 하며, 결코 사람의 도구나 수단이 되시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5장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다곤의 신전 한가운데 놓이는 장면은 우리에게 단지 구약의 역사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이 장면은 우리 시대와 교회를 향한 강력한 영적 거울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를 ‘도구’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껍데기만 앞세워 싸움에 나섰고, 결국 처참히 패배했습니다. 법궤는 빼앗겼고, 하나님은 수치의 대상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진짜 수치를 당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다곤 신 옆에 놓아두며, 하나님을 또 하나의 유용한 신, 액막이, 응급 수단쯤으로 대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지도 않지만, 동시에 경배하지도 않는 태도. 이중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의 전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곤 앞에 무릎 꿇지 않으셨습니다. 다곤이 무너졌습니다. 얼굴이 땅에 닿았습니다. 두 손과 머리가 끊어졌습니다. 인간이 만든 신, 인간이 기대고 있는 허상과 우상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 교회를 향한 경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정말 주로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꺼내 쓰는 수단으로 여기십니까? 하나님을 기념품처럼 선반 위에 올려두고, 위기 때에만 꺼내어 붙잡는 신앙은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위선입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참되게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 신앙을 ‘거룩하게 포장된 자기 욕망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다곤을 세우고 또 세우지만, 하나님은 그 다곤을 계속해서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 없이도 우리는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의 교만은 수많은 ‘다곤’을 만들어 냈습니다. 교육, 과학, 이념, 문화, 자기계발, 심지어 종교 자체도 하나님 없는 인간의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체계, 인간의 구원 계획, 인간의 노력들을 반드시 넘어뜨리십니다. 역사 속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우리 심령 안에서도 말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무언가를 ‘벗어내고 변화되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화란 인간이 하나님 없이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가 오히려 ‘덧입는’ 것, 곧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생명에 삼켜지는 일입니다(고후 5:4).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완전히 덧입혀져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성화’는 인간이 다곤을 또다시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도 부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도구가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시며, 경배받으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을 진심으로 예배하십시오. 그분을 우리가 만든 선반 위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주 보좌 위에 모시길 원합니다. 세상이 무너질 때, 다곤이 무너질 때, 오직 그 하나님의 궤 앞에 엎드려져 있는 자들만이 살게 될 것입니다.
'성경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로보암의 금송아지와 병든 아들, 금송아지 신앙의 허상 (1) | 2025.05.31 |
---|---|
죄의 실체 앞에 선 자에게 임하는 은혜 (1) | 2025.05.31 |
늘 예수가 빠져있는 세상의 잔치 (0) | 2025.05.30 |
천천히 흐르는 물을 버린 자들에게 임하는 파멸 (0) | 2025.05.30 |
샬롬을 빼앗은 사람들, 단 지파의 종교 쿠데타 (1) | 2025.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