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여로보암이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들이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그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이니라. 그대의 손에 떡 열 개와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그에게로 가라 그가 그대에게 이 아이가 어떻게 될지를 알게 하리라.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대로 하여 일어나 실로로 가서 아히야의 집에 이르니 아히야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라. 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여로보암의 아내가 자기 아들이 병 들었으므로 네게 물으러 오나니 너는 이러이러하게 대답하라 그가 들어올 때에 다른 사람인 체함이니라."(열왕기상 14:1~6)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정치적 수완으로 열 지파를 이끌고 왕이 되었으나, 그 아들에게 병이 들었습니다. 권력과 군대, 금송아지 제사장이 있어도 아들의 병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자기 아내에게 변장하여 실로로 가라고 합니다. 자신이 만든 종교 시스템을 믿지 못하고, 진짜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게 답을 얻기 위해 변장한 채 아내를 보냅니다. 그가 금송아지 단을 세우고도, 마지막엔 여호와께 묻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진짜라는 것을 진심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편의적이었고 위선적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정치적 이유로 백성들이 남유다로 제사드리러 가지 못하게 하려고, 인위적 종교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외형은 동일했습니다. 단도 있고 제사도 있고 제사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종교는 흉내낼 수 있어도 하나님의 임재는 흉내낼 수 없습니다. 금송아지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신앙입니다. 금송아지는 단순한 우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삼는 신앙의 형태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도 금송아지를 가리켜 “우리를 인도한 여호와”라고 불렀습니다 (출 32:4). 오늘날 교회에서도 “예수님”이라는 이름 아래 세속적 성공, 축복, 문제 해결을 추구합니다. 이름은 여호와라 부르지만, 마음은 금송아지를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선지자 아히야는 보지 못해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지 않아도 아십니다. 말씀이 없는 시대 같아도, 하나님의 뜻은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찾지 않을 뿐입니다.
열왕기상 14장은 여로보암이 금송아지와 병든 아들을 통해 드러나는 가짜 신앙의 민낯을 보게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들자 여로보암은 아내에게 변장을 시켜 실로로 보냅니다. 실로에는 아히야라는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해 주었던 바로 그 선지자입니다. 여로보암은 이제 그의 입을 통해 다시 무언가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직접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려는 교묘한 자기 의와 두려움이 뒤섞인 행동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이 만든 단(壇)에서, 자신이 세운 제사장들과 함께 북이스라엘만의 예배 시스템을 세워 놓고는, 정작 아들이 병드니 그 시스템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짜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만든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다는 것이 여기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델과 단에 만든 금송아지는 단지 형상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인식,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 인간의 죄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증거였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만든 금송아지 앞에서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여호와라” 고백했던 그 음성처럼, 오늘날도 십자가 아래 앉아 있지만 그 십자가를 소원 성취의 부적으로 여기는 신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부자되기를 원하십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면 왜 여로보암의 아들은 병들었습니까? 왜 하나님은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흉한 일”을 여로보암의 집에 선포하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진짜 예배를 원하시며, 가짜 신앙, 외식적 경건, 자기 의로 세운 종교 체계를 반드시 무너뜨리시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야 진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내를 변장시키는 식으로, 진심보다는 눈가림으로 접근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의 속을 아셨고, 선지자 아히야는 시력을 잃었음에도 그 발소리만 듣고도 “여로보암의 아내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라며 진실을 폭로합니다.
여로보암의 이야기는 단지 한 왕의 비극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이며 은혜의 초청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금송아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예배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고난과 병듦과 막힘은 혹시, 하나님께서 진짜 성소로 다시 돌아오라고 하시는 부르심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가짜 예배를 무너뜨리시고, 참된 예배로 초대하십니다. 그 참된 예배는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자리입니다. 그곳은 부요함이 아니라 죽음과 고난이 깃든 자리이며, 소원을 이루는 곳이 아니라 내 뜻이 꺾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오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평안 속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막히고, 병들고, 넘어지는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진짜 성소일 수 있습니다. 가짜 단에서 내려와, 하나님이 정하신 그 십자가의 길로 돌아가십시오.
그 길은 좁고, 고통스럽지만 오직 그 길에만 참된 생명과 회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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