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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으로

사도신경, 우리가 믿는 바를 고백한다는 것에 대하여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의 첫 항목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 고백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뿌리이며 근본이 되는 선언입니다. 이 고백에는 세 가지 중요한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첫번 째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성경의 첫 구절이며,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존재하셨고,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지만, 믿음으로 수용하는 진리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고, 지으신 모든 것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우주, 인간의 생명까지도 그분의 절대적 주권 아래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야 마땅합니다.

두번 째는 그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단지 ‘전능하신 창조주’일 뿐 아니라, ‘아버지’이십니다. 이는 단지 종교적 문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를 자녀 삼으신 아버지 되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은혜의 관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어떠한 상황과 어려움이 있어도 그분의 선하신 뜻과 권능이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세번 째는 나는 이 하나님을 ‘
믿는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믿다’는 말은 ‘신뢰하다’, ‘의탁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나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이 신앙은 단지 교리의 동의가 아니라, 삶의 태도이며 전인격적인 순복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나는 창조를 믿습니다”가 아니라, “나는 나의 삶을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나의 아버지께 의탁합니다”라는 헌신의 고백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거나, 하나님을 단지 종교적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의 첫 출발에서부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신앙은 진짜 신앙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을 신봉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기초를 잃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면서도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입술의 고백일 뿐 삶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말을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회개하며, 교제하고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보다 우선시되고 공고히 해야 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왜 믿는지, 누구를 믿는지에 대한 분명하고 공적인 선언을 그리스도인은 고백하는 자입니다.

교회는 주일 공예배 시간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형식의 회복이 아닙니다. 믿는 바를 공적으로 말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임을 재확인하려는 것입니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 종교개혁자들 모두가 예배의 모범 속에 사도신경을 넣은 것은 그저 전통을 따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무엇을 믿는 공동체인지 선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신경은 교회의 핵심 교리를 집약한 가장 고전적인 신앙 고백문입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열두 항목으로 요약하여,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
신경’이란 말은 라틴어 credo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믿는다” 혹은 “나는 마음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이란, 사도들이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내어 드렸던 믿음의 본질에 대한 요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단순히 사도들이 각자 한 문장씩 작성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들이 성경에서 가르친 복음의 핵심이 함축되어 있는 요약이며, 초대교회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신앙의 기초입니다.

현대 사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사라지고,
“각자의 진리”만 남은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는 교리, 이념, 객관적 진리에 대한 신뢰를 붕괴시켜버렸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네 진리”나 “내 진리”가 아닙니다.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를 분명히 고백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2문은 묻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답합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모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도신경 안에 잘 요약되어 있으며, 사도신경은 일반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을 요약한 조항들입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신자의 믿음을 검증하는 기준이며,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핵심 문장입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죽은 후 곧바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른 교회는 자연스럽게 신앙의 핵심을 정리하고 고백하는 흐름을 만들어 왔습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2세기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이 남긴 신앙 고백입니다. 지금의 사도신경과 몇 가지 문장이 다르긴 하지만 그 구조와 내용은 매우 유사합니다.

이후 히폴리투스(215년), 루피누스(404년), 그리고 아프리카 교회의 고백들에 이르기까지 사도신경은 형식을 달리하며 전승되어 왔습니다. 마침내 6세기 말 남부 프랑스에서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형식으로 정리되었고, 8세기경
'텍스투스 리셉투스'라는 공인 문서를 통해 보급되어 로마교회에 정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단지 전통이 아니라,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진 보편적 교회의 믿음의 핵심이자 유산입니다.

사도신경은 단순한 암송문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믿는 진리를 확증하는 행위입니다. 초대교회는 세례를 받을 사람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했습니다. 단지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무엇을 믿는가, 누구를 믿는가, 어떻게 믿는가를 분명히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세례나 멤버십을 받기 전에 신앙고백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서 벗어난 사상, 예컨대 창조를 부정하고 진화론을 따르거나,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의 순수성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진리의 내용이 분명해야 합니다. 고백이 없는 신앙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고, 교리가 없는 공동체는 이단과 혼합주의에 휩쓸리게 됩니다.

우리는 매주 사도신경을 고백하며, 우리의 입으로
‘나는 믿습니다’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 고백은 단순한 낭독이 아니라, 삶의 기준이요 진리의 척도이며 구원의 뿌리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습니까? 성령을 믿으며, 교회와 죄 사함과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십니까?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이 믿음을 가지고 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