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열왕기하5:1~6)
열왕기하 5장에 등장하는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시대에 ‘크고 존귀한 자’였습니다. 왕이 직접 신임을 보낼 만큼 영향력이 있었고, 외세로부터 아람을 구원한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었고, 심지어 이스라엘의 왕조차 그의 방문 소식에 사시나무처럼 떨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나아만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왕하 5:1)
이 한 절 안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경적 진단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성공한 자, 강한 자, 존귀한 자처럼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나병환자'입니다. 여기서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는 인간의 모든 자랑과 업적 위에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참된 진단을 드러냅니다. “너는 크고 존귀하나, 그러나 너는 나병환자다.” 하나님 앞에서는 감춰지지 않는 치명적인 병, 곧 죄의 실상이 이 한 마디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여호와를 알지 못한 이방인이었지만, 성경은 그가 아람을 구원한 것도 결국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라고 밝힙니다.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왕하 5:1) 그는 스스로 영웅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역사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줍니다. 믿지 않는 자의 승리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으며, 그 안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섬세하게 이끌어 가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거기에서 멈추지 않게 하십니다. 겉으로는 승리자였지만, 그 안에 숨겨진 그의 본질, 곧 ‘문둥병자’로서의 실체를 드러내십니다. 나아만은 당시 가장 강한 권력자였지만, 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의 힘으로는 이 병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찾은 것도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한 작은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 말로 인해 선지자를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한 계집종의 입을 통해 구원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결국 한 어린 이스라엘 여종의 말을 듣고, 적국 이스라엘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병을 고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핵심을 만납니다. 참된 구원은 힘과 업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낮아짐에서 시작됩니다. 나아만은 이 낮아짐을 경험하면서, 단지 병의 치유가 아닌 인생 전체의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자 그의 몸은 어린아이처럼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이, 그 정체성이 새로워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돌아가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하나님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왕하 5:15)
이 고백은 단지 병이 나은 자의 감격을 넘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겉으로는 치유의 이야기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만난 한 죄인의 회심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정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에 잠김으로써 옛 자아를 내려놓고 새사람으로 일어납니다. 이것은 세례와도 닮은 장면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거듭남을 예표합니다.
이 나아만의 이야기는 또한 아담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보기에 좋은' 선악과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열매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절대성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은 결국 넘어졌고, 하나님은 그에게 생명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아만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자, 회복이 필요한 자라는 것을 드러내심으로써, 오히려 참된 은혜의 길로 그를 이끄셨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문명화되고, 인간은 이제 병을 정복하고 죽음조차 이길 수 있을 것처럼 여깁니다. 유전자 조작과 나노기술로 인류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세상의 모든 진보 뒤에 감춰진 인간의 본질적 부패와 죽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치유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나아만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나는 어디에 기대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내가 쌓아온 업적과 세상의 인정을 나의 구원이라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썩어 문드러진 나병과 같은 죄를 외면한 채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은 그 모든 것 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나병환자더라.” 이 말씀을 들을 용기가 우리에게 있다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삶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심령은 요단강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아만처럼, 전심으로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큰 자란, 오직 자기 부정과 겸손으로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우리는 다시 그 은혜의 강물로 들어가야 합니다.
진짜 회복은 그곳에서만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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