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소식은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가장 약해진 순간에 찾아옵니다. 바울은 지금 말 위에 있었습니다. 채찍을 세 번 맞은 몸으로 빌립보 성문을 나서는 그의 등 뒤로 형제자매들의 찬송 소리가 조용히 따라왔습니다. 누군가 속삭이듯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위로인지 배웅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그 경계쯤 어딘가에 있는 노래였습니다.
'정말 점잖고 사랑스러운 이들이야. 이런 이들을 알게 된 건 특권이지.' 바울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말의 걸음에 몸이 흔들릴 때마다 등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 생각만큼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직업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의사란 남들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을 정면으로 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상처의 깊이를, 고름의 색깔을, 열의 높이를,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는 그 현실 앞에 매일 서야 하는 사람입니다.
누가는 바울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세 차례의 채찍질이 몸에 무엇을 남기는지, 앞으로 며칠이 어떻게 흘러갈지, 그래서 그는 말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길을 떠나야 했고, 관리들은 완강했습니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안 순간, 누가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가방을 들었습니다.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누가가 한 일들을 보십시오. 방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묵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룻밤이었고, 두 사람은 이미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햇볕으로 소독하고, 물로 닦아내고, 이부자리를 새로 요구했습니다. 주인장이 이를 갈았지만 누가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칼을 찬 군인들이 옆에서 노려보는 것을 영리하게 이용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료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취하는 구체적인 형태였습니다. 감정이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사랑입니다. 핏물이 밴 붕대를 걷어내고, 약초 물에 적신 천을 새로 대는 손길입니다. "상처가 아물려면 며칠은 족히 걸리겠어요!"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쉬지 않는 사람입니다.
20세기 의사이자 신학자였던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때로는 당신의 빛이 꺼진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때 다른 사람의 불꽃이 당신을 다시 밝혀줄 것이다." 누가는 바울의 꺼져가는 불꽃 옆에서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화려하지 않게, 조용하게, 그러나 결정적으로 말입니다.
"로마 황제가 교통편을 제공하기는 이번이 처음이군. 하지만 우리에게 진 빚을 다 갚으려면 아직도 멀었지." 실라의 이 한 마디는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어제는 채찍을 내리쳤고 오늘은 말을 내어주는 권력, 어제는 감옥에 쳐넣었고 오늘은 최고급 식사를 대접하라고 명하는 행정관, 그 전환이 너무 빠르고 너무 극적이어서, 오히려 그 권력의 공허함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역사가들은 이와 비슷한 장면을 수없이 기록해 왔습니다. 권력은 자신이 저지른 불의가 드러날 때, 종종 과도한 친절로 그것을 덮으려 합니다. 빌립보의 행정관들이 그랬습니다. "단 한 푼도 받아선 안 되오." 그 명령 뒤에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로마 시민권을 함부로 짓밟은 것에 대한 법적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굳이 이용하거나 즐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누워서 잠들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그에게 필요한 전부였으므로....
저녁이 다 될 때까지 두 사람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누가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누가의 이 장면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의미 깊은 장면입니다. 잠든 사람 곁에서 깨어있는 것, 그것은 일방적인 섬김입니다. 보답받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잠든 사람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조차 모릅니다.
그 곁을 지키는 행위 안에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어떤 '보람'도 없습니다. 그냥 거기 있는 것입니다. 숨소리를 듣고, 열을 확인하고, 혹시 상태가 나빠지면 즉시 손을 쓸 수 있도록 말입니다.
병원 중환자실 간호사들은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환자가 가장 힘든 시간은 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라고 말입니다. 몸이 가장 쇠약해지는 시간이기도 하고, 홀로 깨어 공포와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그 시간에 병상 옆에서 "저 여기 있어요"라고 말해주는 존재가, 때로는 어떤 약보다 강력하다고 합니다. 누가가 그랬습니다. 빌립보에서 16Km를 걸어와, 해가 저무는 동안, 잠든 바울 곁에서 깨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요한 회복의 시간이 흐를 때, 디모데가 나타났습니다. 누가가 목소리를 알아보고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바울이 디모데를 올라오게 했습니다. 디모데의 얼굴이 창백했습니다. "전해 드릴 말씀이 있어요." 바울의 첫 직감은 죽음이었습니다. "누가 죽었다던가?"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더 복잡한 소식이었습니다.
블라스티니우스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구브로 섬으로 건너간 그는 그곳 교회를 심하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바나바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데 열을 올리고, 그러고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넘어갔습니다. "안디옥으로?" 바울의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소리였습니다. 안디옥, 바울의 선교 여정이 시작된 곳입니다. 바나바와 함께 교회를 일으킨 곳입니다. 그 도시의 이름이 블라스티니우스의 행적과 나란히 놓였을 때, 바울의 마음에 어떤 감각이 일었을지, 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상처 입은 몸이 가장 예민해지는 시간에, 가장 듣기 어려운 소식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이야기를 신앙의 눈으로 읽는 사람에게는, 사역의 길에서 육체의 고통과 영적 위협은 거의 언제나 함께 옵니다. 한쪽이 몸을 허물고 다른 쪽이 사역을 흔듭니다. 그 이중의 압박 앞에서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그 사람의 진짜 내면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아직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는 거기서 멈춥니다. 바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누가가 그 옆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독자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압니다. 누가가 거기 있었다는 것을, 약초 물에 적신 천을 대어주던 그 손이, 지금 이 순간에도 옆에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몸이 부서지는 고통과 사역이 흔들리는 소식이 동시에 찾아올 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해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먼저는 그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존재입니다. 가죽 가방을 어깨에 걸고 따라나선 사람, 핏물 밴 붕대를 걷어내는 손, 자신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말없이 증명하는 사람, 길은 아직 멀었습니다.
블라스티니우스는 이미 안디옥으로 향했습니다. 바울의 몸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관 방 안에는, 잠들어도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날 밤, 바울에게 허락된 은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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