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에베소서 6:12)
소식은 편지 한 통에 담겨 왔습니다. 그것도 가이오라는 형제가 목숨을 걸고 전한 긴급한 경고였습니다. 방 안에 앉아 있던 바울, 실라, 누가, 디모데는 그 내용을 듣는 내내 표정이 굳어 갔습니다. 상처투성이 몸으로 빌립보 감옥에서 막 풀려난 바울에게,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매질이었습니다. 블라스티니우스,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그 인물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블라스티니우스의 전략은 놀라울 만큼 정교했습니다. 그는 무작정 칼을 휘두르는 조폭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정밀하게 설계된 해충에 가까웠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 정성껏 가꿔 놓은 밭에 몰래 잡초 씨앗을 뿌리는 자, 혹은 건물 내부의 기둥을 조금씩 갉아먹어 언젠가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흰개미 떼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먼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곳 교회는 그의 정체를 간파했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방향을 틀어 시리아 해안가와 길리기아의 작은 마을들을 훑고 다녔습니다. 조직이 약한 소규모 공동체들은 그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규모가 작고 지도자가 미숙한 모임일수록, 세련된 말솜씨와 율법의 언어로 무장한 그를 걸러 낼 힘이 없었습니다.
누가가 그것을 '협공'이라 불렀을 때,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습니다. 군사 용어가 낯설었는지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정확했습니다. 블라스티니우스는 동시에 두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전선은 교회였습니다. 그는 각 에클레시아를 찾아다니며 신학적 혼란을 심었습니다. 율법과 복음, 할례와 믿음, 모세와 예수 사이에서 갓 믿음을 가진 이들이 헷갈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잘 익지 않은 열매는 작은 충격에도 쉽게 떨어집니다.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전선은 회당이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모이는 곳마다 그는 나타나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버린 배교자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선동가였습니다.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는 하나님이 히브리 율법을 파기하셨다는 이단적 주장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블라스티니우스는 그 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편지를 있는 그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는 편지를 재해석했고, 왜곡했으며, 필요한 부분만 잘라내어 전혀 다른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역정보 캠페인이었습니다. 마치 어떤 정치인의 발언을 앞뒤 문맥을 잘라내고 편집해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말을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술과 같았습니다. 한 번 심어진 오해는 진실보다 빠르게 퍼집니다. 진실은 신발을 신는 사이에, 거짓은 이미 세상을 한 바퀴 돈다는 옛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이오의 편지가 전하는 가장 섬뜩한 정보는 따로 있었습니다. 블라스티니우스가 이제 바울의 여정을 파악하고, 그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에서 소아시아로, 소아시아에서 드로아로. 바울이 씨를 뿌린 곳마다 그가 따라와 잡초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목적지는 분명했습니다. 그리스, 그리고 빌립보입니다.
바울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그자가 오고 있어. 이러고 있는 지금도 조금씩 다가오고 있지." 그것은 마치 탐정 소설의 악당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집요했습니다. 악당은 적어도 정면에서 싸웁니다. 블라스티니우스는 정면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지나간 자리에서 조용히 그의 흔적을 지워 나갔습니다. 그것도 바울 자신의 언어와 논리를 이용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대응책은 무엇입니까? 실라가 먼저 빌립보를 비롯한 여러 교회에 미리 경고를 보내 주의를 시키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손사래를 쳤습니다. "안 되네! 그건 절대 안 돼!" 방 안의 모두가 당황했습니다. 누가는 기겁했습니다. 디모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당연히 경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이 오고 있는데 소방서에 연락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지만 바울이 떠올린 것은 아마도 이런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빌립보 교회에 미리 경고 편지를 보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구성원들은 즉각 블라스티니우스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됩니다. 그가 나타나면 즉시 문을 닫습니다. 좋은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하면, 그 과정에서 교회는 스스로 요새화됩니다. 누가 블라스티니우스의 편인지 아닌지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외부인을 경계하고, 내부적으로 분열이 시작됩니다.
블라스티니우스를 막으려다가, 교회 스스로가 편집증적 공동체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되면 블라스티니우스는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보라, 바울이 사람들에게 나를 두려워하라고 가르친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악마화한다." 경고 자체가 또 다른 공격 빌미가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적을 맞닥뜨리며 얻은 지혜였습니다. 진짜 방어는 공동체의 내부 역량에서 나옵니다. 외부의 경고가 아니라, 공동체 스스로 진실을 분별하는 능력,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 그리고 복음 자체에 뿌리내린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건강한 나무는 폭풍이 와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위적인 방풍벽을 세우는 데 급급한 나무는, 벽이 무너지는 순간 함께 쓰러집니다.
그날 밤, 바울은 열에 들떴습니다. 감염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매질로 생긴 등의 상처들이 곪아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여러 번 같은 자리에 받은 상처들이었습니다. 육신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밤을 새워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기도하고, 치료하고, 약을 바르고, 또 기도했습니다. 며칠 만에 열이 내렸습니다. 바울은 살았습니다.
그리고 짐을 들어 줄 마가라는 젊은 형제가 빌립보에서 달려왔습니다. 평소의 바울이라면 사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습니다. 강한 사람이 도움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 그것도 하나의 성숙함입니다.
데살로니가를 향해 길을 떠나는 아침, 바울은 마가에게 말했습니다. "구브로에서 겪은 내 이야기를 들어 보겠나? 로마군에게 끌려가 하루 종일 병거를 고쳤던 얘기라네." 그것은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려 했을 것입니다. 굴욕적인 강제노동의 경험이 어떻게 그에게 인내와 겸손을 가르쳤는지, 혹은 예기치 못한 고난이 어떻게 전혀 다른 만남의 통로가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방식이었습니다. 적이 뒤를 쫓아오고, 몸은 상처투성이이며, 앞길은 불확실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길을 걷고,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 도시를 향해 발을 내딛었습니다. 블라스티니우스가 무엇을 심든, 바울은 다른 씨앗을 계속 뿌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결국 어떤 씨앗이 더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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