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사기 6장 19~27절
19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 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20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 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25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년 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 지니라
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사사기 6장은 세상과 구원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예언입니다. 이 본문에서 등장하는 기드온은 ‘큰 용사’라는 칭호를 부여받지만, 실상 그는 곡식을 타작하려고 포도주 틀에 숨은 자였습니다. 그의 외모, 배경, 조건은 그를 용사라 부르기에 한없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인간의 눈과 전혀 다릅니다.
기드온은 세상에서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닌 자였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그를 하늘의 용사로 삼으셨습니다. 이 말은 곧 ‘땅의 용사’가 되려는 자들의 가치 체계를 무너뜨리시고, 하나님이 친히 그 속을 비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새기시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능력 있는 자, 조건을 갖춘 자, 외형적으로 멋진 자를 ‘용사’라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외모와 업적에 속지 않으십니다. 신명기 10장 17절과 로마서 2장 11절은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세상 용사는 자기 힘과 판단으로 길을 내고 싸움을 벌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용사는 하나님의 열심과 방법에 철저히 자신을 굴복시킨 자입니다. 무기를 들지 않고 항아리와 횃불, 나팔로 싸우는 자, 즉 인간의 논리로는 불가능한 방법을 신뢰하는 자가 진짜 하늘의 용사입니다.
기드온은 그 하늘의 용사로 세워지기 위해 먼저 '죽음'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밤에 부르셨고, 아버지 집의 바알과 아세라를 찍어내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빛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밤, 즉 고난과 절망 가운데서 시작됩니다. 그게 출애굽의 밤, 유월절의 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밤입니다.
기드온이 드린 예물이 반석 위에서 불에 타오를 때, 이는 단순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열심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의 반석에서 나오는 물, 사사기 6장의 반석에서 터지는 불, 고린도전서 10장의 반석에서 마신 영적인 음료, 요한복음 7장에서 주님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 이 모든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반석에서 나온 불로 예물이 태워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예물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 예물이 무엇이었습니까? 흠 없는 염소 새끼와 무교병이었습니다. 이는 분명히 유월절을 연상케 합니다. 고난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반석에서 나오는 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되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는 구원의 역사요, 새 창조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아버지 집의 칠년 된 둘째 수소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바알의 제단을 무너뜨리고 아세라 목상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 명령은 단순한 우상 제거를 넘어서 자기 부정과 구속사의 복음을 보여줍니다.
칠년은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고통당한 시간이며, 이 소는 그 죄의 상징이자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첫째가 아닌 ‘둘째’ 소를 잡게 하십니다. 왜일까요? 둘째는 첫째를 대신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이 세상의 눈에는 둘째, 하찮고 무시당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그 둘째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를 도말하십니다. 이 장면은 바로 대속, 대신 죽음, 희생, 그리고 은혜의 깊은 그림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세상의 질서와 가치관을 뒤엎습니다. 진짜 장자인 아벨은 가인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에서는 장자인데 장자의 복은 야곱에게 넘어갑니다. 야곱은 형에게 무릎을 꿇고, 환도뼈가 위골되어 평생 지팡이를 의지하며 삽니다. 예수님은 진짜 장자셨지만 둘째처럼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왜일까요? 하늘의 질서에서는 낮아짐과 죽음이 진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장자는 이 땅에서 외면당하고 죽임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3만 2천 명을 해산시키고 300으로, 즉 죽음의 수로 전쟁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 전쟁은 적을 무찌르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교만과 자아를 죽이는 전쟁이었습니다.
나아만은 크고 존귀한 군대장관이었지만, 그는 문둥병자였습니다. 세상은 그를 용사라 부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치유가 필요한 병자였습니다. 그가 요단강에 7번 몸을 담그고 나음을 입은 것은, 자기의 체면과 능력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때 생명을 얻는다는 메시지입니다. 세상의 용사는 힘이 있지만 죽어가고, 하늘의 용사는 약해 보이지만 살아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세우시면서 먼저 그를 무너뜨리십니다. 소를 죽이고, 제단을 허물고, 우상을 찍고, 사람들을 흩고, 숫자를 줄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영광은 철저히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 이 시대의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가 많고 화려하고 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에 타오르는 예물, 반석 위에 세워진 예배, 성령에 이끌리는 순종이 진짜 하늘의 용사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땅의 용사로 살 것인가? 하늘의 용사로 죽을 것인가? 십자가는 언제나 그 질문을 우리 앞에 놓고 있습니다.
“여호와 샬롬”, 평강은 십자가에서만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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