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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속으로

에덴동산에 담긴 복된 소식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7. 11.

창세기 2장 8~17절

8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9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10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 에덴을 지나서는 네 줄기로 갈라져서 네 강을 이루었다.
11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인데, 금이 나는 하윌라 온 땅을 돌아서 흘렀다.
12 그 땅에서 나는 금은 질이 좋았다. 브돌라라는 향료와 홍옥수와 같은 보석도 거기에서 나왔다.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인데, 구스 온 땅을 돌아서 흘렀다.
14 셋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 앗시리아의 동쪽으로 흘렀다.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
15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16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에덴동산은 단지 과거의 한 장소, 인간의 기원이 시작된 신화적 배경이 아닙니다.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은 복음의 원형이자, 그리스도 안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하는 거룩한 상징입니다. 본문을 따라가 보면, 이 동산 한복판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 은혜와 심판이 공존하는 이 장면은 이미 십자가의 구조를 품고 있습니다. 선악과의 명령은 단순한 금지 조항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과 목적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교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십니다(창2:17).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인간이 선과 악을 ‘알지 못할’ 때가 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분별하고 그 중 선을 택하는 것이 인간다움의 표지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토브)은 단순한 도덕적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을 바치려 한 행동은 윤리적으로는 잔혹하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
’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상태, 그 신뢰의 자리에서만 인간은 참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곧 스스로 ‘선악의 주체’가 되려는 반역이었고, 그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이 기준이 되는 길로 접어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통해 인간의 무능함을 드러내셨고, 생명나무를 통해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두 나무는 훗날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로 구체화됩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악과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율법이 완전하나 인간이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
몽학 선생’이 됩니다(갈3:24).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 생명은,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보혈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죄와 싸우고, 우리의 추악함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구원의 진리가 인격 안에서 실재로 경험되고 체화되는 과정, 즉 성화의 여정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의 모습도 지니고 있고, 동시에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이중적 존재입니다. 이 긴 여정에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에덴동산에서 하나의 강이 흘러나와 네 강으로 갈라집니다. 그 물줄기는 단순히 지리적 설명이 아니라, 생명이 온 세상으로 흘러간다는 상징입니다. 강의 이름들은 각각
‘풍성함’, ‘터져 나옴’, ‘화살처럼 빠름’, ‘달콤함’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은혜의 생수가 온 세상을 향해 흘러가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에스겔 47장에서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은 사해까지 흘러가 모든 생명을 살립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8) 하셨고, 이는 성령의 역사로 성도들 가운데 이루어질 새 창조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 강은 처음에는 이름이 없다가 에덴을 지나면서부터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이름이 필요 없습니다. 정체성과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나아가는 순간, 그 존재는 ‘
예수’라는 이름을 입고 오십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이름대로, 예수는 생명을 안고 우리 가운데 오신 생명나무의 실체였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존재처럼 광야를 걷고 있지만, 그 속에서 다시금 생명나무를 향한 은혜의 초청을 받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생, 스스로를 기준 삼아 살아가던 우리에게, 하나님은 다시 그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은혜를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 하나님께 순종하고 붙어 있는 삶, 다른 피조물들을 돌보며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삶이 바로 ‘
예배자의 삶’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삶’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 거할 때, 가지가 열매를 맺듯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결국 복음은 ‘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악과를 따먹은 자의 자리로 내려가셨고, 죽음이라는 감옥에 갇히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생명나무의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 길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 속에 있는 옛 사람의 교만과 기준을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계명 안에 거하며, 생명수를 흘려보내는 존재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에덴동산은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복음의 서사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답게, 은혜를 먹고 순종을 살아내는 삶, 그것이 참 사람으로서의 길이며, 그것이 바로 영생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복된 소식을 ‘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은 시작이었고, 십자가는 완성이며, 그 삶은 바로 오늘, 우리의 발걸음에서 드러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