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세기 2:1~3)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 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이 위대한 은혜의 서막입니다. 창조의 일곱째 날, 하나님은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습니다. 이 안식은 단순한 쉼이나 휴식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온전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은 창조의 셋째 날에 인간과 동물이 살아갈 ‘터전’이 마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터전은 인간의 죄로 인해 무너졌고, 노아 시대에는 저주의 물로 다시 혼돈의 상태로 덮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회복의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노아에게 다시 복을 주셨고,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회복된 셋째 날의 터전’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은 이 회복된 안식의 터전을 사람의 공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을 통해 이루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의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 땅, 그 안식의 완성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이라 부르며, 그 성취를 기다리는 마음을 ‘소망’이라 말합니다.
성경은 이 회복의 시간과 공간을 ‘셋째 날’이라는 반복된 상징을 통해 끊임없이 가르쳐 줍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간 ‘셋째 날’(창22:4), 야곱과 라반 사이의 거리(창31:36), 요셉이 해석한 두 관원의 운명(창40장), 출애굽 후 마라에서 만난 ‘쓴 물’ 사건(출15장),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는 ‘셋째 날’(수1:11) 이 모든 것은 하나같이 죽음과 생명, 심판과 구원, 절망과 소망 사이의 극적인 전환점으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셋째 날의 정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무덤에서 일어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창세기 셋째 날에 마련된 생명의 터전, 회복된 언약의 땅, 참된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무너졌던 창조의 셋째 날을 완전히 회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경은 흥미롭게도 ‘시간’ 자체에 복과 거룩함이 부어졌다고 말합니다. 복은 땅이나 생물 위에 주어지는 것이고, 거룩함도 물질에 대한 구별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은 ‘일곱째 날’ 즉, 시간 그 자체에 복과 거룩함을 심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 이전에 시간의 질서 속에서 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시간, 즉 그분의 임재가 있는 시간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배드리는 시간,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그 삶의 순간마다 우리는 그 나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안식일에 ‘언약의 표징’을 새기셨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고 지키라는 명령은 단순히 율법의 요구가 아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증거였습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오직 여호와’만이 창조주시며, 자기 백성의 주님이심을 기억하는 고백의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안식일도 결국 그림자였습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골 2:17). 그분이 오셨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안식일의 의미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참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삶입니다. 그분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배를 채우기 위한 노동에 매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안식의 그림자를 율법을 넘어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확장합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한 땅의 정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의 입성, 곧 안식에 들어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예수’입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통해 하늘의 안식에 들어갈 교회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400년이 지난 후에도 말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시95:7~11). 이 땅의 가나안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안식은 여전히 미래에 있고, 우리는 지금도 그 안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순례자’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히4:11). 구원은 시작되었지만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우리는 싸워야 하고 인내해야 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남아 있는 안식, 그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안식입니다. 참된 안식은 시간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분과 함께 거하는 그 시간, 그분의 말씀 앞에 엎드리는 그 순간,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맡기는 그 결단의 자리가 곧 안식입니다.
복과 거룩함은 ‘어디에’ 있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 그분의 안식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씁시다. 복된 하나님 나라를 지금 이 순간부터 살아가는 자가 됩시다. “주여, 오늘도 당신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저의 안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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