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2장 15~17절
15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16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나님은 동방 에덴에 동산을 일구셨고, 그 중심에 두 나무를 심으셨습니다. 하나는 생명나무,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에덴은 단순한 낙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예표요, 하나님의 통치 원리가 상징적으로 담겨 있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두신 이 두 나무는 곧 하나님 나라의 중심 원리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질서와 언약의 질서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엘로힘, 전능하신 창조주일 뿐 아니라, ‘야훼’, 언약을 세우시고 성취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든 사건이지만, 그 안에는 단순한 창조를 넘어, 피조물과 맺은 관계의 서사가 녹아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함을, 선악과나무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의 시험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만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 있는 생명은 없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곧 창세기의 영적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처럼 중요한 두 나무를 동산 중심,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두셨을까요?
만일 선악과가 단순한 금단의 열매였다면 동산 구석에 몰래 심어두셔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나무를 동산 중심에 심으셨고, 인간은 반드시 그것을 마주쳐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계명)과 생명(하나님 자신)의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통치된다는 원리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악과는 인간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거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모르고 시험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반드시 그 계명을 어기게 될 것을 아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를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단 하나,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알게 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생명에 이를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아파르 민 하아다마’ 곧 ‘땅의 티끌’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될 때 이 ‘흙’은 아무 의미가 없는 보잘것없는 티끌에 지나지 않음을 반복적으로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과 같은 나’라고 고백했고(창18:27), 사무엘은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신다”(삼상2:8)고 노래합니다. 왕상16장의 바아사와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결과로 티끌처럼 사라지고, 여호수아는 패배 앞에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엎드립니다.
인간은 흙입니다.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면 곧 티끌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은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이미 있다”고 선언합니다. 숨이 코에 달린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긴 순간, 이미 지옥을 사는 존재입니다. 지옥이란 불타는 형벌보다도,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의 계명을 주신 것은 의지를 시험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실체를 폭로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과 조건 속에 놓여 있어도, 인간의 본질은 순종할 수 없는 자입니다. 이것이 선악과의 의미입니다.
선악과 앞에서 인간은 자기를 보고, 생명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인간은 시험을 통과해서 생명나무에 나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선악과 앞에서 넘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생명나무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대립 관계가 아니라, 구속사적 연속성 속에서 함께 이해되어야 합니다. 선악과는 우리의 절망을,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이 두 나무는 함께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는 단지 에덴동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생명나무의 실과를 "이기는 자"에게 다시 허락하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2:7)
무엇을 이기라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을, 그리고 세상의 유혹을, 나아가 자기 의로 살아가려는 본성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있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진짜 이기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연합된 자만이 ‘이기는 자’가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선악과의 시험을 통과한 존재들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와 패배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로써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단순히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을 생명으로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분을 ‘생명나무’, ‘참 포도나무’, ‘생명의 떡’, ‘생수’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모두 티끌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 그 어떤 외적인 성공도 다 허망한 장식일 뿐입니다. 티끌 위에 얹은 금과 보석은 바람 불면 흩어지는 모래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티끌을 ‘사람’이라 부르셨고,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으셨으며, 결국 당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생기에서 생명으로, 티끌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으로 부러워해야 할 것은 이 땅의 벤츠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복을 누리는 성도의 삶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얼마나 예쁜가, 똑똑한가, 부유한가가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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