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18~25절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창 2:18)
에덴의 평화 속에 한 가지 ‘좋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신 그 창조의 절정에서 단 하나, 하나님께서 선하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담의 ‘홀로 있음’이었습니다. 이 ‘로 토브(좋지 않음)’는 단순한 고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하나님의 선한 질서를 가리키는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회복하시기 위해 놀라운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신 후, 그 둘을 하나로 연합시키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결혼의 기원이 아닙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질 생명 연합’의 그림자요, 구속의 복음을 미리 보여주신 선언입니다. 그 깊은 잠은 곧 죽음을 예표하고, 그 옆구리에서 나온 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을 상기시킵니다.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지음 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먼지에서 난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게, 아담으로부터 직접 나왔습니다. 이는 단순히 여자의 창조 방식이 특이하다는 사실을 넘어서, 교회의 존재 방식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신약에서 분명히 풀어줍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 5:31~32)
바울은 창세기의 결혼 장면을 가리켜 “비밀”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한 남녀 간의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신비로운 연합을 가리키는 복음적 예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며 신부를 지으셨고, 그 연합 속에 ‘토브’, 즉 다시 회복된 선함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이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계획의 첫 장이었습니다.
아담이 잠들 때, 하나님은 그의 옆구리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생명을 빼내셨습니다. 이 ‘잠’은 신약에서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그 옆구리가 창에 찔려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피와 물은 교회의 생명의 근원이 되었고, 바로 그 찢긴 옆구리에서 교회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신부의 탄생에 반드시 신랑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놀라운 신비를 말해줍니다. 생명은 죽음에서 나오며, 연합은 희생에서 비롯됩니다. 아담이 갈비뼈 하나를 내어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전체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지음을 받은 존재, 곧 그분의 살과 뼈가 된 존재입니다.
본문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장면 하나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들기 전에 짐승들을 아담에게 이끌어오시고 이름을 짓게 하십니다. 왜 굳이 이 장면이 삽입되어 있을까요? 그 이유는, 아담이 어떤 존재를 돕는 배필로 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모든 짐승들 가운데는 아담을 위한 진정한 짝이 없었습니다. 짐승들은 아담과 근원이 달랐고, 본질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과 짐승의 차이를 히브리어 ‘네페쉬’와 ‘니스마트 하임’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생기를 받아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짐승은 단순히 살아있는 존재일 뿐, 생명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세상에서 나지 않았고, 그리스도에게서 났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태어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세상 속 선행이나 도덕은 결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해 보여도, 생명의 기운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었습니다. 이는 교회의 정체성을 정확히 드러냅니다. 교회는 단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명의 본질을 지닌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삶의 방식 또한 세상과 전혀 달라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리, 자기 부인의 삶,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타인의 유익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사는 삶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그런 성향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짐승들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사 1:3)
이스라엘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기운을 잃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감지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추구하지 못하며, 하늘의 것을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흙에서 태어나 흙을 먹고 흙에 묻히는 존재들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난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담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생명에 반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자유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신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삶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분의 인내, 자비, 겸손, 온유, 자기 부인,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순종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 진짜 교회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결합은 인간 결혼의 기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예표였습니다.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옆구리에서 나온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세상 속 도덕이나 지식, 행위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서 났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그분의 생명으로부터 났고, 그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없다면, 우리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살과 피에서 태어난 자라면, 우리는 그분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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