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사기 6장 8~12절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의 소명 이야기 속에는 단순히 한 사람의 용기를 북돋는 감동적인 에피소드 이상의 깊고 넓은 구속사의 흐름이 담겨 있습니다. 기드온 앞에 등장하는 ‘한 선지자’와 그 뒤를 이은 ‘여호와의 사자’, 이 두 인물의 연속적인 출현은 단순한 이야기 구조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의 관계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언약 소송’의 형태이며, 이 구조 안에서 ‘죽으러 온 선지자’의 그림자가 서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책망하기 위해 먼저 한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그는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키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되짚습니다. 그 내용은 전형적인 언약 형식의 서문과도 같습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이라.” 이 말은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의 주체로서 갖는 법적 권위를 천명하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에 따른 불순종에 대한 책망이 이어지며, 하나님의 정당한 징벌이 암시됩니다.
이 장면은 사사기 2장에서도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됩니다. 거기서는 선지자 대신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하여 같은 방식으로 언약을 상기시키고 책망하며 징벌을 선포합니다. 언약의 소송자로서의 선지자와 여호와의 사자는 결국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언약 백성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법정 고발자로 서는 것입니다.
이 두 사자의 동일성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지자라는 직분 자체가 결국 신적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모형임을 가르쳐 줍니다. 결국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적 표본 선지자의 전형이자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과 죄인은 직접 대면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19~20장에서 하나님께서 신의 산에 강림하실 때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두려움 앞에 중보자로서 모세가 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이 선포됩니다.
이처럼 선지자는 언제나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자로 세워집니다. 하지만 이 중보자적 사명은 결코 영광스럽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히 ‘죽음을 무릅쓴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죄된 백성의 현실과 하나님의 거룩 사이를 오가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며 동시에 백성의 분노가 쏟아집니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의 틈에 선 존재, 죽음을 전제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의 운명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예언했던 “나와 같은 선지자”로서 이 땅에 오셨고, 실제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단지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죽으러 오신 선지자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늘의 뜻을 전하다 핍박받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선지자의 원형이며, 그 그림자가 구약의 선지자들 속에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을 보면, 성령이 교회 위에 강림하자 모든 성도들이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언어적 은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곧 선지자적 공동체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이는 민수기 11장에서 모세가 외친 소원의 성취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선지자적 공동체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며, 그의 형상을 좇아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속에서 교회는 죽음을 무릅쓰고 진리를 선포하는 ‘죽으러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세상 가운데 드러내기 위해,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때론 침묵해야 하고, 때론 미움받아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손해와 수치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지자가 걸어간 길이며,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 광채는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던 표징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대면한 자, 즉 하나님의 형상을 일시적으로 지닌 자였습니다. 하박국은 그것을 “햇빛 같은 광명, 권능이 감추어진 광선”(합 3:4)이라 말합니다.
이 광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본체의 형상”(히1:3)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형상은 고난과 죽음을 통과한 자에게, 곧 예수의 길을 좇는 자에게 주어질 종말론적인 영광입니다. 그 광채는 마지막 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을 ‘변화산의 영광’, ‘부활의 몸’에 대한 예표이며 소망입니다.
우리는 단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적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상과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외치는 부르짖음으로 존재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박수보다 하늘의 음성을 좇는 길이며, 편안함보다 고난을 택하는 여정입니다.
기드온 앞에 나타난 선지자와 여호와의 사자는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는 죽으러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 죽음은 단지 종말이 아니라, 부활과 영광의 시작이다. 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이제 너는, 예수처럼 죽으러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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