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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내 안의 적 그리고 나-지피지기면 백전백패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7. 13.

 

사사기 6장 33~40절

33 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3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35 기드온이 또 사자를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좇고 또 사자를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서 그를 영접하더라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찌기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 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삿6:34)
우리는 종종 이런 구절을 읽으며 기대에 부풉니다. ‘이제 기드온이 멋진 하나님의 용사로 활약할 때가 왔구나.’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사람의 시선과 다릅니다. 인간이 ‘능력’이라 여기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철저히 무너뜨리시고, 하나님만이 일하시겠다는 자신의 열심을 드러내십니다. 기드온은 단지 그 무너짐의 모델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 세계에서 이 말은 좀 다릅니다. 진짜 적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 안의 적입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 드는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기드온은 바알의 제단을 헐었고, 하나님의 표적도 체험했고, 하나님의 사자와 대화까지 나눈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서도 그는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여전히 ‘
자기 자신’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표적을 요구합니다. 이번엔 타작마당에 양털을 두고, 이슬의 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시험합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하나님, 제가 진짜 맞나요? 정말 저를 통해 구원을 이루실 건가요? 제가 할 수 있겠습니까?”

놀라운 건, 하나님께서 이 우유부단하고 자아에 갇힌 기드온의 요구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들어주신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기드온의 기대를 확증하는 응답이 아니라, 그의 자아를 무너뜨리는 역설적 응답이었습니다.

기드온이 시험한 장소는 타작마당이었습니다. 구약에서 타작마당은 하나님께서 백성의 열매를 받으시고, 생명을 추수하시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내린 이슬은 단지 농사의 조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
말씀’과 ‘성령’의 상징입니다(신32:2). 이슬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숨결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그 이슬을 이용해 자기의 ‘
확신’을 얻고자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확증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령’과 ‘표적’을 자기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은사를 자랑하고, 신앙 체험을 자기 과시의 근거로 삼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기드온은 모든 지파가 자기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께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증을 모두 앞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중심적 신앙, 즉 타락한 아담의 자기 신격화의 연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드온의 오만함과 연약함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반석 위에 제물을 올려놓게 하시고, 불을 내려 태워버리셨습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제물 자리에 있어야 함을,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불의 은혜로 모든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무능한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열심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은 하나님의 도구이지, 하나님의 협력자가 아닙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기드온의 의도와 계획은 결국 철저히 무력화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며, 성도가 반드시 지나가야 할 ‘
자아 붕괴의 골짜기’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믿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아야 할 적은 밖에 있는 미디안이나 아말렉이 아니라 내 안의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아는 철저히 하나님을 흉내 내며 살고자 하는 죄된 본성입니다. 이 자아를 방치하면, 그 어떤 전쟁에서도 결국은 백전백패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넘어졌고, 시험했고,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 역시 성경을 알면서도 자주 시험하고, 의심하고, 하나님의 뜻보다 ‘
자기 확신’을 더 갈망합니다. 그게 바로 육신이 가진 욕망의 실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기드온의 불신과 조작된 열심을 모두 아시면서도, 그의 요구에 응답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자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그들의 ‘
잘못된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격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된 자아, 곧 마귀의 자리까지 대신 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순한 사랑의 증표가 아니라, 나의 자아가 무너지는 심판의 장소이며 동시에 부활의 시작입니다.

기드온의 연약함과 오만함,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기드온을 사용하십니다. 아니, 바로 그런 자만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 가장 어리석고 약한 자를 통해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전쟁은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의 자아와 싸우는 것입니다. 그 자아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자신의 확신을 위해 은혜를 조작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리석은 자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시고, 은혜로 이끄십니다. 그것이 구원이요, 새 창조입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였노라.”(여호수아 5:9) 그 수치는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내 자아의 부끄러움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십자가로 덮으셨고, 지금도 덮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