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마가복음 5:1~8)
예수께서 바다를 건너 거라사인의 땅에 발을 디디신 그 순간, 한 사람이 달려 나옵니다. 무덤 사이에 거처하며, 밤낮으로 울부짖고 자기 몸을 돌로 상하게 하는,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자였습니다. 세상은 그를 ‘광인’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제자’로 만드십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귀신 축출의 기사가 아닙니다. 죄에 묶인 자를 건져 제자로 세우시는 복음의 본질을 보여주는 하나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이 한 사람을 통해 죄에 사로잡힌 인간 존재의 참모습을 보고, 또 그 가운데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 부끄러움을 모르는 죄인의 민낯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은 옷을 벗고 있었다.”(눅 8:27 병행구 참조)
죄인은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더러운 것을 자랑하고, 파괴적인 행위를 무용담처럼 떠벌립니다. 감옥에서 벌어진 대화처럼, 사기, 폭력, 음란함이 자랑이 되고, 그 자랑은 서로를 지옥에 더욱 깊이 빠지게 만듭니다. 그 어떤 윤리도, 이성도 그를 제어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죄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살아가지만, 그 상태를 비참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 사람이 무덤 사이의 삶을 산다는 것은 죽음의 문화에 묶인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무덤 사이에 거처하고 있었다.” 무덤은 죽은 자의 자리입니다. 냄새나는 시체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자는, 실상 살아 있으나 죽은 자입니다. 이는 곧 예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을 말합니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썩은 시체처럼 악취를 풍깁니다. 이사야서 65장에서 하나님은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는 자들”을 두고 진노하셨습니다. 이는 우상을 따르며 스스로 거룩하다 여기는 자들에 대한 고발이었습니다. 예수 없이 자신의 힘과 의로 살아가는 모든 인생이 곧 무덤 사이에서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쇠사슬도 끊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공동체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치는 파괴적 에너지로 발산됩니다.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다.” 죄인은 자기 파괴적입니다. 힘이 있어도, 지혜가 있어도, 그 모든 것은 결국 자기를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쓰입니다. 인간의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존재는 점점 더 값싸지고 가벼워집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발전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귀신들린 자는 단지 하나의 사건 속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고,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난 자들은, 그가 누렸던 파괴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자율적이며 자유로운 삶을 산다 여기지만, 실상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해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유라고 착각합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힘인 돈, 지식, 명예, 종교, 모두가 신기루와 같은 우상입니다.
그 무덤, 곧 죽음의 장소에 예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 5:8)고 명하십니다. 그 한 마디가 죄의 모든 권세를 무력화합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그 귀신들은 돼지 떼로 들어가 바다에 몰살당합니다. 이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구원의 예표입니다.
홍해에 빠져 몰살당한 애굽 군대처럼, 하나님은 거짓된 가치들을 바다에 빠뜨려 멸하십니다. 돼지는 유대인에게 가장 부정한 짐승이었으며, 그들에게 귀신을 몰아넣으셨다는 것은 세상의 부정함과 죄의 우상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구원은 ‘악의 세력의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그 세력이 철저히 멸망당하고 참된 가치가 자리 잡는 ‘새 창조’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려 하실 때, 귀신 들렸던 사람은 함께 있기를 간청합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자는 예수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고하라.”(막 5:19)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를 데가볼리로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마가복음 3장 14절에서 “열둘을 세우고 전도하게 하셨다”는 말씀과 동일한 사명을 그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 광인이 바로 복음을 처음으로 이방 땅에 전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바울의 모형입니다. 한때 핍박자요 죄인이었던 자가 이방을 향한 복음의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마 12:28)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자는 복음 앞에 철저히 무너지는 세상과, 그로부터 건짐을 받은 한 사람의 구속 이야기를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귀신을 몰아내고, 우상을 무너뜨리며, 죄인을 제자로 세우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왕은, 무덤 사이에 사는 자를 찾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도 그 무덤 속에서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를 부르셨으며, 이제는 우리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십니다. 죄인이 제자가 되는 복음이 진짜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 속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를 통해 단순한 귀신축출 사건을 넘어, 인간 존재의 깊은 타락과 그 타락 가운데 임하신 구속의 은혜를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5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합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거하고 있는가? 네 삶은 어디에 묶여 있는가?”
예수께서 발을 디디신 거라사 땅은 유대 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율법과 무관한, 이방인의 땅이며, 유대인이 꺼리는 돼지를 기르던 곳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인간적으로 ‘부정한’ 땅,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사는 무덤 한가운데로 들어가셨습니다. 왜입니까? 죄 가운데 묶여 있는 자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곳,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려는 절망의 현장 속으로 예수님은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거라사 광인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벗은 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무덤 사이에서 죽은 자들과 함께 거하며, 자신도 모르게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인생을 살아가던 자에게 예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복음은 죄인이 예수를 찾은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가 죄인을 찾아오신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혹시 그 무덤 사이에 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가치를 힘이라 여기며, 돈과 지위, 사람의 인정과 명예를 의지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주는 안정감이 곧 나의 구원이라 믿으며, 날마다 내 영혼을 찢고 상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찾아오십니다. 죄 가운데 포로 된 인생을 해방하시기 위해,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 인생에 침투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이는 단순히 귀신의 퇴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가치와 허상에서의 단절, 죄의 사슬에서의 해방, 새 사람으로의 거듭남을 뜻하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건짐을 받은 자에게 주님은 사명을 맡기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셨는지를 전하라.” 거듭난 자는 이제 침묵할 수 없는 자입니다. 내가 누구였는지, 예수께서 내게 무엇을 행하셨는지, 어떻게 나를 불쌍히 여기셨는지를 세상 가운데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무덤 사이에 살아가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무덤은 무기력한 종교 안에도 있고, 타락한 문화 속에도 있고, 죄의 본성 속에도 있고, 나 자신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어떤 무덤도 예수님의 발걸음을 막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시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혼돈은 평안으로, 두려움은 기쁨으로, 자해하던 손은 전도하는 손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거짓된 힘에서 나와,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주되심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행하신 큰일을 세상 가운데 전하십시오. 우리는 무덤 속에서 부활 생명으로 불려 나온 자들입니다. 이제는 빛의 자녀답게, 복음의 증인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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