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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으로

숨겨진 하나님의 나타나심, 죄인과 함께 하시는 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5. 26.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마가복음 7:24~30)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향하신 발걸음은 단순한 지역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이방 지역, 곧 유대 사회가
‘부정하다’ 여긴 땅으로의 걸음은 이미 우리에게 복음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유대인만이 아닌 온 인류를 향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서 사람의 눈을 피하여 숨어 계시려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피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가 감추어진 방식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인 이 여인은, 당시 유대인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척받는 존재였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 딸의 귀신들림을 고쳐 달라고 간청할 때, 예수님은 놀랍게도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자녀에게 줄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이 말은 표면적으로만 보면 모진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안에는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녀를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 안에 있는 믿음을 끌어내기 원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옳소이다. 그러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자신에게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믿음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방 여인의 입술에서 참된 겸손과 간구의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이 말로 인하여 네 딸이 나음을 입었다”고 하시며 곧 그녀의 간구를 응답하십니다.

이 사건은 단지 한 아이의 병이 나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복음의 문을, 가장 연약한 자의 믿음을 통하여 여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사모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곧 복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격 없음을 인정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마가복음7:31~37)

곧이어 이어지는 귀먹고 말 더듬는 자의 치유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매우 독특한 장면을 제공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신 후,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에바다!” 이는 “열리라”는 뜻입니다.

이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는 깊은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귀먹고 말 못하는 자의 자리로 내려오십니다. 그의 더러움과 무능함 속으로, 그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무기력의 자리에 자신을 던지십니다. 그의 침을 그의 혀에 대신 것은 곧, 예수님의 거룩하신 것이 죄된 인생과 닿은 장면입니다. 율법 아래서 부정하다고 여겨질 행위들이지만, 바로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과 하나가 되시기 위해 인간의 더러움과 함께하시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예고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는 표현은 인간의 처참한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공감과 슬픔을 나타냅니다. 이는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무너진 현실을 슬퍼하시는 울부짖음이요, 동시에 고통을 짊어지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의 한마디,
“에바다!”라는 선언은 단순한 병의 치유를 넘어, 닫혀 있던 인류의 마음과 영혼, 하늘과의 단절을 여시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두 사건 속에서 철저히 숨으셨고, 사람들에게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은혜와 능력은 감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죄인의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조차, 그 영광이 인간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었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자에게는 반드시 드러났음을 말해 줍니다.

결국 이방 여인의 딸도, 귀먹고 말 더듬는 자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가 그들을 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자격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격 없음을 인정하는 자에게, 낮은 자리에서 주님의 발끝이라도 붙잡는 자에게 흘러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 앞에 서 있습니까? 우리는 아직도
‘나는 자격이 있다’며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고 있진 않습니까? 아니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더러운 개라 할지라도 주님의 부스러기 은혜면 족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 하시기 위해 오셨고, 그들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은혜를 베푸시며,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 믿음은 고백이며, 전적인 의탁이며, 자기를 부인한 끝에 터져 나오는 절실한 사모함입니다.

“에바다!” 오늘도 그 음성이 우리에게 들립니다. 막혀 있던 귀가 열리고, 잠잠하던 입이 열리기를 원하십니다. 자격이 아니라 은혜로, 우리의 가리워진 눈과 귀와 마음이 열려, 숨겨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듣고 말하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 곁에 머물렀던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사연과 상처를 안고 예수님께 다가갔고, 그분의 따뜻한 시선과 말씀을 통해 치유와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예수님 곁에 머문 사람들은 예수님께 친밀함과 따뜻함을 느꼈고 그렇게 그분 곁에 머물며 친근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처음부터 예수님께 호의적으로 마음을 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1:46)라고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말했듯이 예수님은 사람들의 무시를 받던 고장 나자렛 출신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의 곁에 머물기로 결심한 것에는 예수님의 진심이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마음의 긴장을 녹여 준 그 무엇, 바로 예수님의 비장의 무기인 자비와 따뜻함이 있지 않았을까요?

현대에서도 예수님의 따뜻한 시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느 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이현아 교사는 그림책을 통해 아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그들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는
“현아 선생님은 나에게 나를 표현할 기회와 나를 열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교사의 태도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대하셨던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그들이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 곁에 머무는 삶은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시선과 사랑을 전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는 삶이 바로 예수님 곁에 머무는 삶입니다. 오늘도 예수님 곁에 머물며, 그분의 사랑을 닮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