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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으로

진짜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5. 26.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마가복음 7:1~9)

예수님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먼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일부러 올라왔습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적하고, 그것을 문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 지적은 단순한 위생 문제를 넘어서 종교적 전통, 즉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이름 아래 굳어진 인간의 규칙을 어겼다는 고발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다 사람의 전통을 덧붙여,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막 7:6, 8). 겉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처럼 보이나, 실상은 자기 의를 주장하고 전통을 앞세워 하나님의 뜻을 가리우는 외식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인간의 진짜 더러움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15, 20). 예수님은 단순히 음식을 통한 정결법을 무효화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인 죄의 근원을 밝히신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의 외부가 아니라, 우리의 '', 곧 마음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신앙을 자신이 경험한 기적이나 체험, 기도의 응답, 열심 등으로 정의합니다. 기도 응답이 빠르고, 병이 나았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그 신앙이 더 우월하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간증은 점점 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과거를 꾸미는 경우까지 생깁니다. 단지 무좀 하나 나았는데, 마치 발이 썩어 들어가던 것이 나은 것처럼 과장되고, 동네에서 조금 불량하던 사람이 갑자기 조폭 두목이었던 것처럼 각색되는 일도 허다합니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기복 신앙은 결국 자기 신앙을
‘소유한 체험’으로 규정하게 합니다. '나는 이것을 체험했다', '나는 이런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식으로 신앙을 말할 수 있다면, 진짜 복음, 진짜 구원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도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감정적 체험에 기대지 않고, 곱게 예수를 믿는다', '기적이나 간증 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신앙을 가졌다'며 자부하는 사람들은 외면상 바리새인과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동일합니다. 신앙을 자기가 얼마나 바르고 고상하게 믿고 있는가로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주님, 저는 저런 광신자들과는 다릅니다. 저는 예수를 교양 있게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그러므로 진짜 신앙은 체험이나 도덕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우리의 체험이나 도덕, 열심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때로는 도움될 수 있으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며, 신앙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경험이나 상황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나오는 죄성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악한 생각, 음란, 교만, 탐욕, 거짓, 광기...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더럽게 하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신의 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죄를 철저히 직면하고, 그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소유하라’ 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부인하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더 나은 인간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비주의를 쫓는 신앙도, 기복주의에 기대는 신앙도 결국은 자기를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전부’라는 신앙입니다.
그 복음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을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안에서 깨끗함을 입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너희를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 무엇을 믿고 있는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나 자신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신앙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들로, 즉 눈에 보이는 체험과 기적, 인간적인 노력과 경건의 모습으로 신앙을 판단하고 계량하려는 유혹에 자주 빠집니다.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는가', '얼마나 많은 응답을 받았는가', 혹은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가'라는 기준으로 정의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바리새인의 길이며, 외식의 신앙입니다. 체험을 자랑삼고, 행위를 자랑삼고, 심지어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조차도 예수님의 눈에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는 책망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 앞에 철저히 무너지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낱낱이 드러내고, 날마다 마음에서 솟구치는 음란과 탐욕, 시기와 교만, 위선과 악독을 직면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붙드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나는 주님을 헛되이 경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신앙은 외적인 경험과 형식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가? 구원이란 무엇인지, 은혜란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가 복음의 본질,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내 안의 죄를 바라보게 하시고, 외적인 무엇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나의 자랑을 내려놓고, 십자가 앞에 나아갑시다.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은혜를 알게 되고, 진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바깥의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죄를 통회하며 주님 앞에 무릎 꿇으십시오. 형식이 아니라 복음으로, 체험이 아니라 진리로, 외식이 아니라 회개로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