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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으로

문둥병 치유와 믿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5. 25.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 하시니라."(마태복음8:1~4)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허다한 무리가 그분을 따랐습니다(마 8:1). 그러나 그 많은 무리 중 오직 한 사람이, 주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들고 나아왔습니다. 그는 문둥
병자였습니다. 사회에서 쫓겨나며, 율법에 의해 부정한 자로 낙인찍힌 인생, 누구도 가까이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감히 예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마 8:2). 이 한마디는 절망의 끝에서 터져 나온 믿음의 고백이자, 은혜를 향한 갈망의 부르짖음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 8:3). 율법 아래에서는 제사장만이 문둥병의 정결함을 선포할 수 있었고(레 14장), 그 정결의식은 살아 있는 새가 죽은 새의 피에 잠겼다가 하늘로 날아가는 복음적 그림자였습니다. 죄가 죽고, 새 생명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지금 그 모든 율법의 그림자를 실체로 성취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곧 참 제사장이시며, 죄인을 정결케 하시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손길 하나, 그 말씀 한마디가 죄악된
육체를 뒤덮은 저주를 깨뜨립니다. 더 이상 진에 격리된 자가 아닌, 하나님과 화목된 자로 부름받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마 8:4)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그 병의 치유가 단지 병의 치유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요구하던 정결함을 은혜로 성취하신 복음의 선포였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고침이 아니라, 죽었던 죄인이 살아난 새 창조의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태복음8:5~13)

그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인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믿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십니다. 그곳에서 또 다른 병자를 위한 간청이 들려옵니다. 이번에는 백부장이 예수께 나아와,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마 8:8)라고 합니다. 자신이 가진 권세를 비유하며 주님의 권위를 고백하는 그 믿음은, 이스라엘 중에서조차 볼 수 없던 믿음이라 주님은 칭찬하십니다.

이 믿음은 무엇입니까? 기적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믿음, 오직 주님의 뜻과 주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믿음입니다.
“말씀만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백부장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입을 빌어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곧 약속의 후손은 혈통이나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이루어진다는 선언입니다. 참된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임을 드러내십니다.

그의 간구는 단지 병 고침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로,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권위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자신은 이방인이며 예수님의 발걸음을 자신의 집에 들일 자격도 없다는 낮춤, 그러나 주님의 권위에 대한 확신은 오히려 누구보다 크고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리라.”(마 8:11-12) 이 말씀이 얼마나 날카롭고 통렬한 것입니까? 혈통과 율법적 특권에 안주하던 유대인들에게는 심판의 말씀이요, 믿음으로 주께 나아오는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막8:22~26)

마가복음 8장에서는 또 다른 장면이 이어집니다. 벳새다에서 예수님은 소경을 고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번에 고치시지 않습니다. 첫 번째 안수 후, 소경은
“사람이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완전하지 않은 회복. 분명 주님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과 우리를 향한 상징입니다.

앞선 장면에서 제자들은
“우리가 떡을 하나밖에 가져오지 않았다”고 걱정하며 예수님의 누룩에 대한 교훈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막 8:21) 그리고는 곧 이어 이 소경을 고치시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는 영적으로 둔한 제자들을 향한 은유적 사건입니다.

우리의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그분을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세상의 떡을 구하고, 자기 의에 붙잡히고, 옛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안수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리고 마침내 우리 눈이 열려 주님을 바로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에게서 율법의 경계를 넘으시고, 백부장에게서 이방인의 믿음을 인정하시며, 소경에게서는 더딘 믿음의 과정을 인내하십니다. 주님은 제사장이시며, 왕이시며, 선지자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죄인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만지시고, 말씀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자체이십니다.

오늘 나는 지금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나는 그 앞에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하고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내가 감당치 못함을 고백하고, 다만 그분의 말씀만을 구하고 있는가? 나의 눈은 아직도 세상과 사람을 나무처럼 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도 다시 손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다시 보라, 밝히 보게 될 것이다.” 그 주님의 손은 오늘도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은혜, 그것이 참된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