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5:15~27)
우리는 이 세대를 ‘악한 때’라고 말합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진리를 왜곡하고,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며, 구별됨 없이 세상과 함께 흘러갑니다. 이런 때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지혜롭게 행하라’고 말합니다. 곧,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만’이라는 단어는 어떤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삶 전체를 채우는 방향과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채워져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지혜 있는 자 같이 행하라”고 말한다. 악한 시대 속에서 어리석게 흘러가지 말고, 뜻을 분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 뜻은 다름 아닌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 어디선가 많이 들었고, 또 바란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충만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흘려버립니다. 우리는 과연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성령세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순간,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단번에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 순간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이것은 ‘사실’이며, 우리의 신분이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은 다릅니다. 이것은 지속적이며 반복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삶 가운데 드러내라는 요청입니다. 성령 충만은 내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실천이자 방향입니다.
성령 충만의 가장 분명한 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성령 충만한 자들의 행위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들은 기적을 자랑하거나, 신비로운 체험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반드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 앞에서 복음을 전했고, 바울은 핍박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이 모두는 성령 충만의 열매였습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요16:14)
성령은 결코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곧 ‘예수님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5장은 성령 충만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도 보여줍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가 넘치며, 피차 복종하고, 아내와 남편이 그리스도와 교회와 같이 사랑하고 순종하는 관계를 이룹니다.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는 구체적인 삶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의 삶 자체가 예수를 전합니다.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사랑하는 남편, 주께 순종하듯 남편을 존중하는 아내, 서로를 낮추며 섬기는 교회 공동체, 이 모든 모습이 복음이며 증거입니다.
성령 충만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을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담대히 선포합니다. 성령 충만한 가정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어느 장로님이 자신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장로님의 누나가 클래식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동생과 함께 좋은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갔다고 합니다. 거기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동적인 공연에 심취해서 음악을 듣고 있는데 동생은 공연 시작 10분이 경과한 시점부터 코를 골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보다 못해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누님이 동생을 끌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승부 근성이 강한 분입니다. 그날로 클래식 음악 책을 사서 그 음악의 작곡가들이 어떤 의도로 작곡했는지 열심히 공부를 하고 그 음반들을 다시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작곡가의 의도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고 들으니까 너무 재미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저작의도를 모르고 성경을 읽으니 그렇게 힘이 없고 이해를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저작 의도를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예수에 관해서만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이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놓은 것이 성경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관해서만 적혀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엉뚱한 것들을 찾아내서 미처 하나님이 상상하지도 못하신 심오한 것들을 생각해 내고 엉엉 울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그건 마치 비발디 사계 중에 봄을 들으면서 가을의 낙엽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습을 만일 비발디가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건 비발디에 대한 모욕입니다. 비발디는 봄을 열심히 그려놓았는데 낙엽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에 대한 모욕입니다. 여름을 들으면서 썰매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의 저작의도를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세례’, ‘성령 충만’, ‘성령의 은사’ 등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면 우리가 아무리 가슴속에서 솟는 짜릿한 경험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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