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 (마태복음 12:38~39)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 말합니다. 이 말은 반쯤은 옳고, 반쯤은 틀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분명히 ‘체험’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초자연적이고 신비로운 현상이나 감정의 고양, 혹은 문제 해결의 만족이 아니라, 고난과 환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평강과 인내, 그리고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믿음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기적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기적을 보여 달라 했고, 자신들의 눈으로 ‘하나님’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어쩌면 인간적인 당연함일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만지고 싶은 욕망은 인류의 오래된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에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왜 주님은 기적을 거절하셨을까요?
기적이 주님의 사역에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공생애는 기적으로 가득했습니다. 문제는, 그 기적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목적이 아니라 *표적(sign)*이었습니다. 이 표적은 단순한 능력 과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사역을 계시하는 상징적 메시지였습니다. 그 기적을 통해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셨고,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복음을 미리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7가지 대표적인 기적이 등장합니다. 요한은 이 표적들을 선별하여 기록한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요 20:31) 기적은 단지 문제 해결의 수단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계시적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여섯 개의 비어 있는 정결 항아리, 그리고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 이는 단순한 잔치 회복이 아니라, 율법과 의식에 얽매여 외형만 남은 유대교의 빈 껍데기를 향한 선언이었습니다. 비어 있던 항아리는 형식뿐인 종교, 정결 예식은 있지만 진정한 정결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으로써, ‘자신의 피’를 상징하는 새 언약의 기쁨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진정한 잔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없이는 시작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이 기적은 단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깨어진 인간의 상태와 그로부터 회복될 하나님의 나라를 암시합니다. 인간의 질병은 단순한 육체적 문제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이며,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해 나타난 증상입니다. 예수님은 그 단절을 회복하시기 위해 오셨고, 고침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질병이 없다는 복된 소식을 보여주셨습니다.
세 번째 이적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누워 있던 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이 장면은 단지 오래된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줍니다. 수많은 병자 중 오직 한 사람,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자를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복음은 전적인 은혜요, 전적인 주권이며, 인간은 그저 수동적인 수혜자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네 번째 기적, 오병이어는 그저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작은 도시락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의 자원은 부족하고, 우리의 계산은 절망뿐이지만, 예수님은 그 작은 것을 들어 수만 명을 배불리셨습니다. 아이가 가진 도시락은 무능력한 인간의 상징이며, 은혜는 그런 불가능한 곳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임할 수 있으며, 우리의 행위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외에도 물 위를 걷는 기적, 맹인의 눈을 여시는 기적, 나사로를 살리신 부활의 기적까지… 이 모든 기적들은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사인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들은 하나같이 십자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장 큰 기적은 바로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곧 죄인을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원하는 신앙은 끝내 표면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표적이 신앙의 기초가 되어선 안 됩니다. 신앙은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 기적은 오직 말씀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한 부가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오늘날 기복주의적 신앙이나 신비주의 운동은 기적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느낌이나 감동, 경험이 아니라 진리에 기반해야 합니다. 철판으로 만든 거대한 배가 물에 뜨는 이유는 우리의 느낌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된 부력의 원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확신도 우리 감정의 높낮이가 아니라 말씀의 약속에 근거해야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조차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감옥에서조차 주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체험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동일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방식으로 기적을 보여주시진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말씀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고난 한복판에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문제와 갈등, 연약함 앞에 서게 됩니다. 질병, 가난, 관계의 아픔, 영적 침체… 이 모든 앞에서 우리는 종종 ‘기적’을 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셨던 기적들처럼, 오늘도 내 삶에 기적이 임하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통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단지 문제 해결이나 순간적인 위로가 아니라, 그 기적 너머의 영원한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병이 나아지지 않아도, 문제가 풀리지 않아도—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사탄은 오늘날 교회를 기적 중심, 체험 중심으로 유혹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감정의 기복에 신앙을 걸게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불신앙의 길이며, 결국 ‘다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다’는 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선언 앞에 설 위험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다른 표적을 주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곧 십자가와 부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는 이 복음만이 영혼을 살리고,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바라기 전에, 말씀을 붙드십시오. 문제 해결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구하십시오. 응답을 기다리기보다, 복음의 진리 안에 머무르십시오. 기적의 유무에 따라 흔들리는 신앙이 아닌, 십자가에 굳게 선 신앙을 가지십시오. 감정이 아니라 진리에 뿌리내린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할 때 주님은 우리 삶에 가장 크고도 확실한 기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이 의인이 되는 기적, 죽을 자가 살아나는 기적, 그리고 자기중심의 인생이 하나님 중심의 예배자가 되는 기적입니다. 이보다 더 크고 놀라운 기적은 없습니다. “기적을 넘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길 끝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 기적을 통해 나의 소원을 이루려 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기적을 통해 드러내신 주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구원의 은혜를 더욱 깊이 붙들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믿으며, 그 진리 위에 견고히 서는 신앙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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