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누가복음3:16~17)
기도원의 강단 위에는 큼지막하게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서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성령이여! 성령이여!”를 외쳤습니다. 그들의 외침은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강단 아래에 있는 헌금 바구니 속에는 병든 자의 금반지와 귀걸이, 시계가 가득 담겨 있었고, 몇몇은 그것들을 흡사 노획물처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날,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병을 낫고 싶어 하는 병자들의 절박함과, 그 절박함 위에 기생하는 인간의 욕망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곳은 오순절 운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곳이었습니다.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며, 방언이 터지고, 사람들이 웃고 뛰며, 집단적으로 무언가에 이끌리듯 몰입하는 집회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고 마치 하늘의 능력이 임한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러나 진짜 성령세례란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오실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불은 타작마당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불입니다. 성령세례는 뜨거운 성령 체험이나 신비한 은사의 체험이 아니라,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심판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 백성의 정체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성령과 불로 주어지는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죄인 된 자가 회개하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임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연합의 실재를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곧 구원의 본질이며 복음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운동은 성령세례를 ‘구원 이후 두 번째 축복’, 일명 second blessing이라 말하며, 방언이나 병고침, 초자연적 체험을 필수적인 표지로 삼습니다. 마치 그런 체험이 없는 자는 믿음이 부족한 사람인 것처럼 여기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방언을 연습하게 하고, 억지로라도 웃고, 춤추게 하며, 신유의 현상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하지만 성령은 억지의 영이 아니십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는 훈련으로 획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닙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방언이든 치유든, 그것은 본질이 될 수 없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와 유사한 현상들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집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천마사에서도, 무속신앙의 굿판에서도 방언과 신유, 넘어짐, 웃음이 존재합니다. 동일한 형상과 현상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일 수는 없습니다. 성령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죄로부터의 회개와 생명으로의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자기 백성 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각인시키십니다.
우리는 오늘날, 능력 있는 신앙을 추구하며 오히려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되,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십니다. 진짜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외적인 체험보다 ‘내적인 죽음’을 통과합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삶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방언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병고침보다 위대한 기적은 ‘죄 사함’입니다. 눈에 보이는 표적보다 더 큰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란 죽음입니다. 성령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하시기 위해 요단강에서 죄인의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과 연합되어 십자가에서 죽고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세례요, 구원의 실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더 오래 살고 싶은 욕망입니까? 병 고침의 기적입니까? 아니면 예수와 함께 죽고 사는 복음의 능력입니까? 성령은 우리를 춤추게 하기 위해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십자가로 끌고 가시기 위해 임하십니다. 그 길에서 비로소 우리는 알곡이 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히 “방언을 하는가?”, “뜨겁게 기도하는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가?”,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이 나의 삶 가운데 실제화되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성령을 ‘체험’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지 않는지, 나는 은사를 ‘신앙의 증거’로 삼고 있지 않는지, 나는 복음보다도 ‘능력’을 구하고 있지 않는지를 말입니다.
예수님은 타작마당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십니다. 외적인 열심과 감정적 뜨거움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회개하며, 자기부인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좇는 자를 하나님은 알곡이라 부르십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종교적이나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은 자는 쭉정이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내 안의 옛 사람을 불로 태워주옵소서. 주님, 내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자 되게 하옵소서. 주님, 성령의 불로 나를 정결케 하시고, 복음의 능력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성령세례는 선택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의 본질입니다. 성령 없는 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령 없이 회개할 수 없고, 성령 없이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으며, 성령 없이 거듭남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체험 중심 신앙”에서 돌이켜 “복음 중심 신앙”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능력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은사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병고침을 위해 예수를 따르는 자가 아니라, 죄사함을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쭉정이입니까, 알곡입니까?
오늘도 주 앞에 나아가십시오. 불과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주님의 손에, 우리 인생 전체를 내어드리십시오.
그분이 키를 드시고 당신의 인생을 타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알곡으로, 하나님 나라의 곡간에 들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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