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어느 여름날 오후, 한 청년이 기도원 예배당 구석에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그는 몇 주째 금식과 기도를 반복하며 무언가를 간절히 구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그 자신도 몰랐습니다. 그저 가슴 안쪽에서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고, 얼굴은 상기되어 붉어졌으며, 손끝에서부터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감각이 팔을 타고 올라왔습니다. 그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뜨거움이 자신을 채우는 것이 기뻤습니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었고, 그 사람은 일어났습니다.
그로부터 수년 후, 같은 기도원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오랫동안 중보기도자로 섬겨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뜨거운 열기를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깊은 기도에 잠길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치 한여름에 냉수 한 모금을 마신 것처럼 머릿속이 갑자기 투명하게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서늘함이 찾아오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는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말들이 흘러나왔습니다. 나중에 보면 그 말들은 모두 누군가의 삶에 정확하게 맞닿아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각각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근원에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표현할 때 우리는 오랫동안 '불'이라는 언어를 사용해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경험할 때 몸 전체가 타오르는 것 같은 열감을 경험합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손과 발끝이 따끔거리며, 온몸을 전류가 통과하는 것 같은 감각이 밀려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흥분이 아닙니다.
마가의 다락방을 떠올려보십시오. 오순절 날 일백이십 명의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던 그 공간에, 갑자기 강한 바람 소리가 가득하더니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그들은 즉시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밖으로 나가 수천 명 앞에서 두려움 없이 외쳤습니다.
베드로는 그날 하루에만 삼천 명을 회심시켰으며, 이후 병든 자들이 그의 그림자만 스쳐도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불이었습니다. 뜨거움이었습니다. 이 뜨거움은 능력과 직결됩니다. 마치 용광로가 쇠를 녹여 형태를 만들어내듯, 뜨거운 성령의 임재는 사람 안에 잠들어 있던 영적 능력을 활성화시킵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손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근처에 고침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학습된 감각이 아니라 영이 몸을 통해 말하는 방식입니다. 능력 사역자에게 이 열감은 일종의 나침반입니다. 그것이 강해질수록 사역의 현장이 가깝다는 신호이고, 그것이 지속될수록 그 사람에게 주어진 능력의 깊이가 더해진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뜨거움에만 익숙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은 누구나 아는 표현이지만, 성령의 '서늘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마치 여름만 알고 겨울을 모르는 사람처럼, 우리는 뜨거움은 알지만 차가움은 낯설게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뜨거움과 차가움은 서로 다른 실체가 아닐 수 있습니다. 매운 고추를 먹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입 안이 화끈거린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시원하다고 합니다. 같은 자극인데 감각이 다르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극도의 뜨거움은 어느 순간 청량감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열감과 청량감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실체에서 비롯된 두 가지 감각적 반응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책망은 유명합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라." 이 구절을 우리는 흔히 '뜨거움이 좋고 차가움은 타협'이라는 식으로 해석해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보면, 하나님은 뜨겁든지 차갑든지, 두 가지 모두를 원하십니다. 미지근함만이 문제인 것입니다. 뜨거움과 차가움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한 방식으로 충만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 이야기를 새로운 눈으로 읽어보십시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한 빛에 둘러싸였습니다. 너무도 강렬한 빛이었기에 그는 그 자리에서 시력을 잃었습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빛 가운데서 그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 경험을 오순절 다락방의 경험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선명합니다. 다락방의 제자들은 불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반면 바울은 빛을 경험했습니다. 눈이 멀 정도의 강렬한 빛입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그는 음성을 들었고, 소명을 받았으며,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습니다. 불이 능력을 부어준 것이라면, 빛은 방향을 알려준 것입니다. 뜨거움이 권능을 수여했다면, 서늘한 빛은 소명을 각인시켰습니다.
이 서늘한 빛의 경험, 즉 청량감을 동반한 신성 조명(divine light)의 임재는 주로 소명과 연결됩니다. 특히 사도와 선지자로 부름받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로 세움받는 사람이 처음 그 부르심 앞에 섰을 때, 불이 임하기보다 서늘한 기운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스며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순간 머릿속이 수정처럼 맑아지고,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청량감의 특징은 명료함입니다. 뜨거움이 감성적인 사람들에게 친숙한 언어로 찾아온다면, 청량감은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더 익숙한 방식으로 임합니다. 그것은 감정을 흔드는 대신, 생각을 맑게 합니다. 신선한 산 공기를 마시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처럼, 청량감이 임하면 생각의 안개가 걷힙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말씀의 의미가 갑자기 단순하고 명확하게 보이고, 기도하는 중에 상대방의 상황이 마치 사진처럼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예언자들이 '보았다'고 표현하는 것들이 바로 이 청량감 속에서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언 사역을 오래 해온 한 선지자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예언의 말씀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서늘한 기운이 옵니다. 등이 서늘해지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오면, 저는 그것이 신호임을 압니다. 그 느낌을 따라 입을 열면, 말씀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청량감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예언의 내용 이전에 예언의 분위기를 먼저 알려줍니다. 영적 감지기로서의 청량감인 것입니다.
마치 경험 많은 기상학자가 바람의 방향과 하늘의 색깔만으로 날씨를 예측하듯, 예언자는 이 청량감을 통해 영적 분위기를 먼저 읽게 됩니다. 때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그 서늘한 기운이 임하면 예언자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이 두 경험이 항상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 사역과 예언 사역을 함께 행하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감각이 동시에 임하는 혼합된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몸은 뜨겁고 머리는 맑아지는, 얼핏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가지 사역이 동시에 열리고 있는 신호입니다.
예언적 치유, 즉 선지자적 통찰과 함께 행해지는 신유 사역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사역을 행하는 사람은 손에 열감을 느끼면서도 머릿속에는 환자의 상황과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경험을 합니다. 뜨거움은 몸을 통해 능력을 흘려보내고, 청량감은 머리를 통해 방향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두 경험의 강도는 그 사람에게 주어진 능력과 예언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사역이 성숙해질수록, 두 감각은 더욱 선명해지고 강렬해집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 자체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를 감지하지 못하거나 그 흐름에 무감각해진 상태입니다. 오랫동안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습관적으로 기도하다 보면, 한때 뜨거웠던 사람도 열감을 잃어버리고, 한때 맑았던 사람도 청량함을 잃어버립니다. 생각이 복잡해지고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예언의 통로가 좁아지고, 세상적 욕망이 쌓이면 능력의 통로가 막힙니다.
뜨거움을 회복하는 길은 능력을 구하기 전에 먼저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청량함을 회복하는 길은 말씀을 더 많이 쌓기 전에 먼저 마음을 비우고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선견자는 복잡한 머리가 아니라 맑은 머리로 봅니다. 능력 사역자는 강한 의지가 아니라 뜨거운 임재 속에서 일하늕것입니다.
뜨거움과 차가움은 결국 하나의 강에서 나뉘는 두 줄기 물입니다. 그 근원은 같습니다.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다만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어떤 사역을 열어가시느냐에 따라, 우리 몸과 마음이 반응하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능력의 통로로 세워지는 사람에게는 불이 임하고, 예언의 통로로 세워지는 사람에게는 빛이 임합니다. 불은 태우고 정화하며 힘을 주고, 빛은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며 지혜를 줍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불만 알아왔습니다. 이제는 그 빛도 알아야 할 때입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사람만큼이나, 서늘하게 맑은 사람도 하나님 나라에는 필요합니다. 아니, 어쩌면 이 시대에는 지혜의 영이 임하는 서늘한 선지자들이 더욱 간절히 요청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불이 능력을 통해 사람들을 치유하고 해방시킨다면, 빛은 방향을 통해 교회와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오늘도 어떤 사람에게는 불로, 어떤 사람에게는 빛으로 임하십니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그 임재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사도행전 2:3~4)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디모데후서 1:7)
'성령과 기름부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치유와 관계의 공간 언어 (0) | 2026.02.27 |
|---|---|
| 허물어야 세워진다 (0) | 2026.02.19 |
| 말씀으로 치유 받은 사람들 (0) | 2026.02.12 |
| 질병의 원인 - 그 깊은 의미를 찾아서 (0) | 2026.02.12 |
| 온전해지는 길로 인도하기 위한 영적 경험 (0) | 2026.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