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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기름부음

허물어야 세워진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19.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린도후서 5:1)

어느 봄날, 한 건축가가 낡은 집을 새로 짓기 위해 부지를 찾아왔습니다. 그 자리에는 오래된 건물이 서 있었습니다. 골조는 뒤틀렸고 벽은 곳곳이 갈라져 있었지만, 수십 년을 그 안에서 살아온 가족에게는 여전히
'집'이었습니다.

건축가가 말했습니다.
"이 건물을 완전히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가족은 선뜻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낡았어도 그것은 자신들의 손으로 가꾸고 지켜온 삶의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의 신앙 여정을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셨을 때, 유대인들은 따져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보이겠느냐?"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리라."

유대인들은 46년이나 걸려 지은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는 말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건물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손으로 만든 것을 허물면, 손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 그 자리에 세워진다는 깊은 진리를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역설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빚어가시는 방식의 핵심인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아들이었습니다. 형들의 시기를 받을 만큼 특별했고, 꿈을 꾸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애굽의 노예 시장에 내던지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까지 씌워 감옥에 처넣으셨습니다. 요셉의 눈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형들의 손에 구덩이에 던져지던 그 순간, 보디발의 아내에게 손가락질당하던 그 날, 감옥 안에서 날짜를 세던 그 긴 밤들, 그 모든 시간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요셉에게서
'손으로 지은 것들'을 하나씩 허물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편애가 만들어준 특권의식, 형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존심, 자신의 꿈이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착각, 이것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난 자리에, 마침내 손으로 지을 수 없는 것이 들어섰습니다.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는 지혜, 7년의 기근에서 민족을 건져낼 비전, 자신을 판 형들을 용서하는 마음은 요셉이 스스로 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그를 비워냈고, 하나님이 그 빈 자리를 채우셨습니다.

다니엘의 이야기는 더욱 극적입니다. 고레스 왕 3년, 다니엘은 하나님의 환상을 받기 위해 3주 동안 좋은 음식을 삼갔습니다. 고기도 포도주도 입에 대지 않았고, 몸에 기름도 바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기름을 바르는 것은 단순한 미용이 아니라 건강과 생명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그것마저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환상이 임했을 때, 다니엘은 쓰러졌습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두려워 달아나 숨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 자리를 압도했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피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달아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달아날 힘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땅에 얼굴을 대고 쓰러졌습니다. 숨이 멎는 것 같은 공포,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그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때 한 손이 그를 어루만졌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달아난 사람들은 끝내 그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패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쓰시려 할 때, 그 전에 반드시 어떤 허무는 과정이 먼저 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광야를 떠돌았고, 야곱은 사기꾼 삼촌 라반 밑에서 20년을 보냈으며,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이후 아무도 찾지 않는 아라비아 광야로 사라졌습니다. 이사야는 제사장의 권위를 내려놓고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모두 자신이 쌓아온 것, 자신이 의지하던 것, 자신이 자랑하던 것이 먼저 무너졌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고통을 적으로 봅니다. 빨리 끝내야 할 것, 피해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교회에서도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고통을 주시지 않는다. 고통은 마귀에게서 오는 것이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없으면 우리는 오히려 참된 자녀가 아닌 사생자라고까지 말합니다.

몇 해 전, 한 청소년 상담사가 이런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자녀의 비행으로 찾아오는 부모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 말 속에는 단순한 놀라움 이상의 것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나의 가정은 괜찮고, 이런 불행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오랜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어쩌면 하나님이 오래 기다리신 순간일 수 있습니다. 내가 쌓아온 안전한 울타리가 무너지고,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삶은 이 진리를 가장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창녀와 결혼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충격적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개인적 불행 자체를 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지로 삼으셨습니다. 가출을 반복하는 아내, 정서적으로 상처받는 자녀들, 단란함이란 기대할 수 없는 가정, 호세아의 삶 전체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탄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고통을 단지 우리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이 시대에 무언가를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만의 성전을 짓습니다. 안정된 직장, 건강한 가정,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명성, 오랜 세월 쌓아온 신앙의 자부심, 이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이 손으로 지은 것들을 허무십니다. 직장이 흔들리고, 가정에 균열이 생기고, 오래 쌓아온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 앞에 섭니다. 다니엘의 곁에 있던 사람들처럼 두려워 달아나는 것, 아니면 쓰러지더라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달아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달아난 사람들은 끝내 그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손으로 지은 것이 허물어지는 것은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손으로 지을 수 없는 것이 들어서기 위한 준비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비우고, 하나님은 그 빈 자리에 당신의 것을 채우십니다. 능력, 비전, 그리고 이웃의 고통이 비로소 보이는 눈, 이것들은 편안함 속에서는 결코 자라지 않습니다.

낡은 집이 완전히 허물어져야 새 집이 들어섭니다. 그 건축가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허무는 과정이 얼마나 아프고 낯선지를 그는 충분히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허물어진 자리에 무엇이 세워지는지도 말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지금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다면, 혹시 그것이 새로운 시작의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달아나지 마십시오. 쓰러지더라도 그 자리에 계십시오. 그 손이 당신을 어루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