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비가 내리던 오후였습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권사님 한 분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오십 대 초반, 교회에서는 누구보다 부지런히 봉사하고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녀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씻지 못한 사람처럼 피곤함이 쌓여 있었습니다. "목사님, 저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 요즘 기도가 안 됩니다. 성경을 펴도 그냥 글자만 보이고, 예배 시간에 앉아 있어도 하나님이 거기 계신 것 같지가 않아요.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하나님이 저를 떠나신 건지 모르겠어요." 목사님은 그 말을 듣고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녀만의 고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역사상 어느 때보다 성경이 많이 보급되었고, 신학교가 많으며, 설교가 넘쳐납니다. 유튜브를 열면 세계 최고의 설교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점점 더 멀게만 느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먼 과거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구약성경의 세계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모세 이래로 전해 내려온 거룩한 율법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이 서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있었고, 율법을 해석하는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그들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팡질팡했습니다. 산당을 짓고 바알에게 분향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읽으면서 고개를 젓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면서 저럴 수 있을까,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멀었습니다. 험한 산길을 넘어 며칠을 걸어야 닿는 그곳에, 가난한 농부나 양을 치는 목동이 얼마나 쉽게 갈 수 있었겠습니까.
제사장은 그들의 마을 근처에 없었습니다. 율법의 규범은 복잡했고, 배울 기회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산당은 먼 하나님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바알의 제사는 간단했습니다. 형식도 없고 규범도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민초들은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거기 나아갔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답답하고 막막한 심정에서 그렇게라도 해서 마음의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배반으로 보셨습니다. 선지자들은 외쳤습니다. "그 마음이 나를 떠났다." 백성들은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버린 게 아닌데,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데, 라고 항변했을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소수였고, 환영받지 못했으며, 그들의 말은 이스라엘의 일상 속에서 힘을 잃어갔습니다.
얼마 전, 어느 교회의 한 집사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빚은 쌓이고, 기도는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 상사가 그에게 투자를 제안했습니다. 단, 조건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신뢰하는 무당에게 한 번 얼굴을 보여주면, 그 무당이 이 사람에게 투자해도 된다는 확인을 해줄 것이고, 그러면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사님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처지였으니까, 한동안 갈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거절했습니다. 상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목사도 전도사도 아니잖아요. 무얼 그렇게 까다롭게 믿어요? 여기 목사님들도 전도사님들도 다 잘만 오는데. 지금 찬 밥 더운 밥 따질 때예요? 얼굴 한 번 보여주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에요?"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우리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우리 중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답답함이 오래되면 사람은 생각지도 못했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산당으로 간 것도 바로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이 넘쳐나고, 교회는 도시마다 가득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여전히 갈팡질팡합니다. 묵상기도가 무엇인지, 관상기도가 어떤 것인지 들어보지 못한 성도들이 태반입니다. 기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으니 제 멋대로 기도하고, 성령을 경험하는 법도 배운 적이 없으니 제멋대로 경험합니다. 가르침이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산당인 것입니다.
호세아서에서 제사장이 백성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고 하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지도자가 이끌어야 할 곳으로 이끌지 않으면, 백성은 결국 그 길이 잘못된 길일지라도 자기가 아는 길로 갑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로마 가톨릭은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인데, 거룩한 제도권이 보증하는 일인데, 의심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한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추방당하고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 소수가 옳았음을 밝혔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시대의 상식은 언제나 이렇게 어긋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낯설게 오시는 것일까요? 모세에게 하나님은 타오르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타는 연기로, 또 때로는 지나가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엠마오로 걸어가던 두 제자에게 하나님은 낯선 행인의 모습으로 찾아오셨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바리새인에게 하나님은 길 위에 쓰러진 강도 만난 이웃의 형상으로 오셨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엠마오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 곁에서 걸으시는데도,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이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어떤 모습으로 와야 한다는 고정된 그림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셔야 한다는 그림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즉각 응답이 와야 하고, 고난이 오면 빠르게 끝나야 하며, 하나님의 음성은 선명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그 그림에 들어맞지 않는 방식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분이 이미 우리 곁에 계신데도 우리는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라고 탄식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거룩한 찬양이 울려 퍼지던 그 시절에도, 병든 자들은 실로암 연못가로 모여들었습니다. 성전의 찬양 소리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더 큰 고통으로 들렸을지 모릅니다. 나는 저기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인데, 저 노래는 나와 상관없는데, 라는 소외감 속에서, 지금도 매 주일 교회의 자리를 채우지만, 가슴속에는 풀리지 않는 고통을 안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 말씀이 공허하게 들리고, 찬양이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며, 기도가 벽에 막힌 것만 같은 사람들, 그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멀리 계시고, 침묵하시고, 알 수 없는 분으로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은 그들 곁에 이미 와 계신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기대하던 모습이 아닌, 아주 낯선 모습으로 말입니다. 목이 곧고 고집 센 백성이라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그 말이 낯설지 않은 것은,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방식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리려 합니다. 우리의 형식 속에, 우리의 기대 속에, 우리의 일정 속에 하나님을 맞추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틀을 늘 비껴서 오십니다. 떨기나무로, 나그네로, 쓰러진 이웃으로, 그리고 어쩌면 오늘 당신의 문을 두드리는 낯선 목소리로 오십니다. 그 낯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오래된 과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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