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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5.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요한계시록 14:1~5)

봄이 오면 꽃이 핍니다. 그 꽃이 피기까지 나무는 겨우내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합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그 시간 속에서, 나무는 조용히 꽃을 준비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어쩌면 그 겨울을 견뎌 내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은 그 겨울을 견뎌 낸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계시록 12장과 13장에서 성도들은 짐승에게 짓밟힙니다. 경제적으로 고립되고, 사회적으로 배척당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잃습니다. 읽다 보면 저절로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왜 당신의 백성이 이렇게 당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그런데 14장에 이르면 장면이 바뀝니다. 방금 전까지 짐승에게 짓밟히던 그 백성들이, 시온 산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 교차를 반복합니다. 지상의 고난당하는 교회와, 천상의 이미 승리한 교회를 번갈아 보여 주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
너희는 지금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이긴 사람들이다."

전쟁터에 나간 병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탄약이나 식량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확신 하나가 총 한 자루보다 강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 확신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시온 산이 어떤 산인지 기억하십니까?
모세가 율법을 받은 시내 산은 두려움의 산입니다. 짐승이라도 그 산 기슭을 밟으면 죽어야 했습니다. 모세조차 "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했습니다. 그 산은 우리 모두가 받아야 마땅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반면 시온 산, 곧 모리아 산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대신 죽게 하신 곳입니다. 죽어야 할 자가 살고, 대신 어린양이 죽은 그 산. 성경은 그곳을 은혜의 산, 구원의 산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모두 시내 산 앞에 서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시내 산이 아니라 시온 산으로 부르셨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빚을 치르시고, 우리를 그 은혜의 산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이 바로 거기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가 잘 실감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현실을 날마다 조금씩 실감해 가는 여정입니다. 이미 이겼다는 것을 배워 가는 시간입니다.

14장 4절은 승리한 성도들을 가리켜 "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고 부릅니다. 문자 그대로 결혼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혼인을 귀하게 여깁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절은 영적인 순결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여자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12장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17장의 음녀 바벨론, 곧 세상입니다. 성도들의 정절이란 그 음녀로부터 자신을 지켜 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혼인 풍습이 이것을 잘 설명해 줍니다. 유대인들은 정혼 후 신랑이 신부 값을 완전히 치를 때까지 떨어져 지냈습니다. 돈이 없으면 노동으로라도 갚아야 했습니다. 그 빚을 다 갚은 날, 신랑은 밤에 신부의 집으로 찾아가 신부를 데려오고 혼인잔치가 시작됩니다. 그 기다림의 기간 동안 신부는 정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정절을 잃으면 혼인은 즉시 파기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빚을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
다시 오마"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사이에 있습니다. 신랑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신부들입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우리는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무릎 꿇지 않는 것, 세상이 주는 달콤한 것들에 마음을 팔지 않는 것, 그것이 정절입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때로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더 깊이 알아 갈수록, 우리는 점점 그 정절에 합당한 삶으로 변해 갑니다. 전혀 변화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느리더라도 반드시 변합니다.

같은 절에서 성도들은 "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도 묘사됩니다. 우리는 흔히 어린양이 이끄는 길이 평탄하고 화려한 길이길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자기의 꿈과 계획과 야망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어린양을 따르는 길입니다. 때로는 가족과의 갈등을 감수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선교사로 파송된 한 젊은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유망한 대기업 취업을 포기했고, 아내는 안정된 교사직을 내려놓았습니다. 양가 부모님은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
왜 멀쩡한 직장을 버리고 그 위험한 곳에 가려 하느냐?"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을 설득했지만 끝내 허락을 받지 못한 채 떠나야 했습니다. 그 선교지에서 그들은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교회를 섬겼습니다.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 부부가 보내온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길이 어린양이 이끄시는 길임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줄 몰랐습니다." 사망의 골짜기든 푸른 초장이든, 예수님이 함께 계신 곳이라면 따라가는 사람들, 그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게 어린양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 땅에서 상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 세에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이 구절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드는 질문이 있습니다. "정말요? 헌금한 것의 백 배를 주신다고요?"

어느 교회에선가 그런 설교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바치면 백 배로 돌아온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헌금한 것의 백 배를 돌려받은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냥 낸 만큼 손해입니다.
그렇다면 이 백 배의 상은 무엇입니까?
이 구절의 목록을 자세히 보면, 유독 '
아버지'가 빠져 있습니다. 집도, 형제도, 자매도, 어미도, 자식도 백 배로 돌아오지만, 아버지만은 없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이 직접 답하셨습니다.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 23:9) 우리의 진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백 배의 상의 핵심은 하나님 아버지 자신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상은 하나님의 성품에 점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겸손을 배우고, 아량을 배우고, 더러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변해 가는 자신을 발견하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
아, 나는 진짜 하나님의 자녀가 맞구나." 그 감격이 바로 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상을 이렇게 고백합니다(고전 9:16~18). 전에는 자신의 모든 행동이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했고, 자기를 증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난 후, 이제는 보상을 바라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동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받은 상입니다. 인격의 변화, 성품의 성숙, 그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서 주시는 유일한 보상입니다.

많은 분들이 성경에서 가장 나쁜 인물로 가롯 유다를 꼽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는지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판 값, 은 삼십은 약 120데나리온입니다. 돈궤를 맡은 유다에게 그 정도는 언제든지 만질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는 돈이 탐나서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닙니다.

유다가 배신하기 바로 전에 붙어 있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짜리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사건입니다. 유다는 그걸 보고 불쾌해합니다. "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우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는 그 향유보다도 싼 값에 예수님을 팔아버립니다.

유다는 모든 것을 현세적, 물질적으로 계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용해 이 땅에서 권세와 부귀를 누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겠다고 하시자, 배신감과 절망이 밀려왔고, 결국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자신의 가장 값진 것을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 앞에 쏟아부었습니다.

성경이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배치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은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마리아입니까, 유다입니까?
아직도 "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했는데 왜 나에게 물질적 보상이 없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유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25년 전 어떤 사람이 늦가을 빗속에 설악산 입구의 작은 순두부 집에서 혼자 막걸리를 마시고 있을 때였습니다. 비 오는 평일 낮에 손님이 있을 리 없었는데, 맞은편에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청년 하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괜히 궁금해진 그는 합석을 청했고, 그렇게 막걸리 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설악산에서 지게를 지는 분이었습니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열일곱 살 때부터 그 산을 오르내렸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순박한지, 그 후로는 설악산도 좋았지만 그분을 만나기 위해 설악을 더 자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분이 신문에 소개된 것을 보았습니다. 임기종 씨, 그는 그 당시에 새벽 다섯 시부터 저녁 다섯 시까지, 80킬로그램에서 120킬로그램의 짐을 지고 대청봉을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한 달 수입은 60만 원에서 80만 원, 점심은 계곡 물에 밥을 말아 지게를 진 채 먹습니다. 그런데 그 수입의 절반을 양양의 장애인과 독거노인들을 위해 썼다고 합니다. 강원 도민 봉사상으로 받은 800만 원 상금은 전액 그 노인들의 제주도 여행 경비로 내놓았습니다. 그 노인들이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여행하는 동안, 임기종 씨는 120킬로그램짜리 냉장고를 지고 산장으로 배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
나는 이웃에게 빚진 사람의 마음으로 삽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당신보다 더 힘든 일을 하고, 당신보다 적게 벌고, 당신보다 적게 가진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왜입니까? 그는 진짜 보상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가 아닙니다. 잘 쓰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닮아가는 것, 그것이 상입니다. 그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싶었습니다.

14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새 노래는 "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배울 자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직접 경험한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 그 어린양이 나의 모든 빚을 치르셨다는 것, 그 감격 하나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점점 변해 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
전에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고백이 새 노래입니다. 거창한 찬양이 아닙니다. 변화된 삶에서 우러나오는 감격의 고백,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부르는 새 노래입니다.

당신은 이미 승리한 사람입니다.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사람입니다. 지금은 나약해 보이고 매일 실패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당신은 반드시 이겨 내실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만 점검하십시오. 지금 당신이 기대하는 상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집입니까, 땅입니까, 건강입니까, 사업의 번창입니까? 그것들을 바라는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아직 유다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진짜 상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조금 더 인내할 수 있게 된 것, 어제보다 조금 더 용서할 수 있게 된 것, 어제보다 조금 더 나누며 살게 된 것. 그것이 백 배의 상입니다. 그리고 그 상을 받는 자만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설악산 지게꾼 임기종 씨처럼, 가진 것은 적어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노래가 오늘 당신의 입술에서도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