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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양의 탈을 쓴 용의 목소리 - 땅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하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2.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요한계시록 13:9~15)

1986년 소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처음 현장에 출동한 소방대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마주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불꽃은 아름다웠습니다. 푸른빛과 보랏빛이 밤하늘을 수놓으며 타올랐고, 구경꾼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 그 장관을 감상했습니다. 그것이 치명적인 방사선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름다울수록,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깊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소방대원들은 며칠 안에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이 경고하는 두 번째 짐승의 이야기는, 어쩌면 체르노빌의 그 푸른 불꽃과 닮아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요한은 먼저 10절에서 선언을 합니다. "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이것은 예레미야서의 언어를 빌려온 구절입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패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듯이, 요한은 지금 성도들에게 주어질 고난의 필연성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분명히 사로잡히게 될 것이고, 칼에 맞게 될 것이다." 위로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선언 안에는 결정적인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도 막지 못하는 사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막아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날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앞장서서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처음 도착한 곳이 어디였습니까? 홍해였습니다. 앞은 폭 32킬로미터의 망망대해요, 양쪽은 믹돌이라 불리는 깎아지른 절벽이었습니다. 병법을 아는 장수라면 절대 그런 곳에 진을 치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전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껏 이스라엘을 이끌어다가 그 진퇴양난의 자리에 처박으셨습니다.

왜그랬을까요? 광야는 목적지가 아니라 학교였습니다. 홍해가 갈라질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바다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신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릴 때, 하나님이 하늘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반석이 터져 강 같은 물이 흘러나올 때, 이 땅도 그분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 전에, 먼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치고 싶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 속에서 우리는 그분을 배웁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군에 입대한 아들을 위해 3년 내내 밥상에 아들의 밥을 따로 퍼놓았습니다. 가족 모두 그 3년 동안 고기와 과일을 끊었습니다. "
우리 아들은 군대에서 못 먹는데 우리가 어떻게 먹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아들의 어머니가 군사령관실 문을 두드리며 "내가 대신 죽을 테니 아들만 살려 달라"고 무릎을 꿇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시편 139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직역에 가깝게 옮기면 이렇습니다. "
하나님, 당신의 생각은 제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심오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가 너무 힘들어 울다 지쳐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그 때도 주님은 주무시지 않고 저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삶이 무너지는 것 같아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싶을 그 순간에도, 아버지는 잠들지 않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선언하는 것은 절망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막아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함께 견디겠다는 약속입니다.

10절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요한의 시선은 새로운 존재에게로 이동합니다. "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바다에서 올라온 첫 번째 짐승이 정치적·물리적 힘으로 세상을 압제하는 세력이었다면, 이 두 번째 짐승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겉모습은 어린양입니다. 부드럽고, 온순하고, 종교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입을 열면 용의 말이 흘러나옵니다.

이 짐승의 정체는 요한계시록 19장 20절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
거짓 선지자." 잘못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가짜 목사, 가짜 신학자, 진리를 왜곡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어둠의 세력의 구조는 이렇습니다. 맨 꼭대기에 용, 곧 사단이 있습니다. 그가 첫 번째 짐승인 세상 권세에 힘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짐승인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세상 권세를 경배하게 만듭니다. 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득합니다. 가르칩니다. 심지어 기적을 보여줍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정면에서 오지 않습니다. 양의 탈을 쓰고 옵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13절) 거짓 선지자들의 무기는 이적입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생기(프뉴마)를 불어넣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흉내 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집회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거품을 물고, 통곡합니까? 그리고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선포되고 있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오신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 성령이 오시면 "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깨닫게 하시고, 연약한 육신으로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내면을 조명하시는 분입니다.

기적은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막 13:22~23)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이 진실을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나사로를 내 형제들에게 보내주소서. 죽은 자가 살아 나타나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사람은 어떤 기적을 보아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기적을 일으킨 사람을 숭배하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목사의 안수 기도로 사업이 기적처럼 살아났다면, 사람들은 그 목사를 숭배하게 될 뿐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은 더 직접적입니다. "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기적을 좇아다니는 것이 멸망의 표지일 수 있습니다.

요한1서 4장 3절은 말합니다. "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예수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그토록 초라하게 오면 안 된다. 메시아라면 힘 있는 자로 왔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힘의 논리를 앞세우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이미 요한의 시대에 와 있었고, 기독교 이천 년 역사 내내 교회 안에서 살아 움직여 왔습니다.

"
적그리스도가 언제 오는가, 그가 누구인가"를 따지는 데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수업 시간에 제일 먼저 "시험 언제 봐요?"라고 묻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그 시간에 그냥 공부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들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
예수를 이용해 이 땅의 성공과 번영과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 환난과 고난 대신 기적과 축복만을 약속하는 자들, 그들이 바로 땅에서 올라온 짐승입니다. 그들은 사단처럼 뿔을 드러내고 오지 않습니다. 어린양처럼, 따뜻하게, 매력적으로 옵니다. 체르노빌의 그 아름다운 푸른 불꽃처럼 말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그 날 많은 사람이 "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기적을 행했다는 사실이 아무런 보증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평안을 찾습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라빈 수상과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도 노벨 평화상을 함께 받았습니다. 그런데 라빈 수상은 수상 이듬해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총탄에 암살당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이 만들어낼 수 있는 평화의 실체입니다. 조약은 있지만 평화는 없습니다. 선언은 있지만 안식은 없습니다.

진정한 평안은 이 땅의 것에서 오지 않습니다. 금고의 크기에서도, 건강 검진 결과지에서도 오지 않습니다. "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평안은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우리는 그 평안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홍해는 이미 갈라졌습니다. 만나는 이미 내리고 있습니다. 반석에서 물은 이미 흐르고 있습니다. 믹돌의 절벽 사이에서, 신 광야의 사막 한가운데서, 우리는 이미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이 우리를 사로잡아 끌고 갈 때, 칼로 우리를 후려칠 때, 우리는 로마서 8장 35절의 말씀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칼을 맞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이 세상의 것들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병이 낫지 않아도, 사업이 회복되지 않아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 하나님만으로 평안하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 평안을 이 세상에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뿐입니다. 이 세상은 끝이 아닙니다. 영원의 작은 시작일 뿐입니다. 힘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