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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짐승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 - 666,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7.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또 내가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요한계시록 13:16~18,14:1)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겨울, 동독의 한 목사는 자신의 교인들이 하나씩 서방으로 떠나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그들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혼란의 틈을 타서 교회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말쑥한 양복을 입고 성경을 옆에 낀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제 자유의 시대가 왔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번영이 옵니다. 서독처럼 잘살게 됩니다." 교인들의 눈이 빛났습니다. 그 목사는 오랫동안 그 빛나는 눈빛이 두려웠다고 훗날 고백했습니다. 뿔 달린 마귀는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번영을 약속하는 설교자가 왔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이 경고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표는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군인의 팔뚝에, 노예의 이마에, 신전 봉사자의 손에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 표는 두 가지를 말해주었습니다. 첫째, 너는 누구의 소유인가? 둘째, 누가 너를 보호하는가? 신전 제사장의 손에 찍힌 표는 그가 그 신에게 속한 자임을, 노예의 이마에 찍힌 표는 그가 어느 주인의 것임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바로 이 개념을 빌려옵니다. 그런데 그는 표를 두 종류로 나란히 놓습니다. 13장의 짐승의 표와 14장의 하나님의 표입니다. 시온 산에 선 어린양 곁에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정확히 대조되는 장면입니다.

성경에서 '
이름'은 그 존재의 정체성 자체입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이고, 야곱은 '속이는 자'이며, 예수는 '구원자'입니다. 이름이 곧 그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새겨졌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성도 안에 성령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표를 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짐승의 이름이 새겨졌다는 것은, 사단 자신이 그 사람 안에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표는 이마와 손에 찍힙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마는 지성과 이성을, 손은 행동을 상징했습니다. 생각도 행동도 모두 그 주인을 향해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것은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이마에 글자가 보이지 않듯, 짐승의 표도 눈에 보이는 바코드나 전자 신분증이 아닙니다. 표는 정체성이고, 소속이며, 삶의 방향입니다.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가장 불편한 진실이 등장합니다. 16절은 그 짐승의 표가 '
모든 자'에게 새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작은 자도 큰 자도, 부자도 빈자도, 자유인도 종도, 예외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원래는 그 표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고전 15:22). 아담의 타락 이후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사단의 통치 아래 놓였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것은 타락한 죄인에게 주어진 저주의 표였으며, 가인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과 한 편임을 나타내는 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저주받은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집어넣으시고, 그들이 받아야 할 짐승의 표를 예수에게 새기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 그 짐승의 표를 대신 받아 사망에 이르셨고, 이제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예수로 보아주십니다. 그들에게서 짐승의 표는 지워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집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안경을 쓰시고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이 놀라운 이야기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으며,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그 인침이 바로 하나님의 표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666입니까? 성경에서 7은 완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6일에 창조하시고 7일에 안식하셨을 때, 그 7일은 완성과 안식의 날이었습니다. 6은 그 완성에 하나 모자란 숫자, 영원히 안식에 이르지 못하는 미완성을 상징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완성을 뜻하는 7과 삼위일체를 뜻하는 3을 합하여 하나님을 777로 표기했습니다.

13장의 용과 바다의 짐승과 땅의 짐승은 성부·성자·성령을 그대로 모방합니다. 하나님처럼 보이되 하나님이 아닌 것, 구원처럼 들리되 구원이 아닌 것, 평안처럼 느껴지되 평안이 아닌 것, 그 영원한 미완성의 세력이 666입니다.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여섯 번째 인과 나팔과 대접은 항상 심판으로 끝나고, 일곱 번째는 항상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환상으로 끝납니다. 666은 그 일관된 대조 위에 서 있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숫자를 한 인물의 타락에서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열왕기상 10장 1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
솔로몬의 세입금의 중수가 육백육십육 금 달란트요." 이 숫자가 우연히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이 장은 솔로몬의 타락이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에게 세 가지를 금하셨습니다(신 17:16~17). "금과 은을 많이 쌓지 말라. 말과 병거를 많이 두지 말라.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 이유는 단순하고도 깊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왕은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군사력도, 재력도, 외교적 혼인도, 그것들이 안보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장하신다는 것을 왕이 몸으로 살아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세 가지를 모두 어겼습니다. 666 달란트의 금을 쌓았고, 병거 1,400대와 마병 12,000명을 모았으며, 후궁 700명에 첩 300명을 두었습니다. 그 결과는 열왕기상 11장에 기록됩니다. "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세상의 힘으로 자신을 채우려 했던 왕의 마음은 결국 하나님을 잃었습니다. 666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이 땅의 힘과 재물과 명예에서 안전을 찾으려는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을 부추기는 세력과 가르침 전체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교회의 가장 큰 위험은 교회 밖에서 오지 않는다. 복음처럼 들리지만 복음이 아닌 것이 강단에서 선포될 때 교회는 무너진다." 666의 세력은 교회 밖 어둠 속에 있지 않습니다.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존경받는 설교자의 언어로, 예배당 안에 앉아 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언제나 솔로몬의 666과 닮아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살게 된다. 헌금을 드리면 병이 낫는다. 믿음이 크면 사업이 번창한다. 하나님을 잘 달래면 당신의 이름이 높아진다."

바벨탑을 쌓던 자들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이름을 내자"(창 11:4)는 것이었습니다. 666의 본질은 우주의 중심에 ''를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 ''를 위한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믿습니다. 마태복음 7장의 그 사람들처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지 않았나이까"라고 외치다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는 말을 듣는 그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반면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불이익이 따릅니다. 17절은 말합니다. "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상인 조합인 길드에 가입할 수 없었습니다. 길드에 가입하면 수호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거부하면 조합에서 쫓겨났고, 조합 밖에서는 정상적인 거래가 불가능했습니다. 신앙을 지키면 생계가 위태로워졌숩니다.

오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원칙대로 세금을 내고 정직하게 장사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뇌물을 거절하면 계약을 잃게 됩니다. 거짓 보고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승진에서 밀립니다.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삶은 이 세상에서 언제나 손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 땅에서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이 땅의 이익을 얻어내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영화 〈패치 아담스〉에는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이며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
이게 몇 개냐?" "네 개입니다." "바보." 그 너머를 보라는 것입니다. 문제에 집중하는 사람은 언제나 네 개만 셉니다. 실존 인물인 미국 의사 헌터 아담스는 의사의 사명이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말기 췌장암 환자 곁에 앉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과 함께 그는 '인간을 치료'하려 했습니다. 그와 함께한 이들은 편안하고 행복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목회자와 교회의 방향입니다. 병이 낫고 부자가 되는 것,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병은 나았는데 죽음이 여전히 두렵고, 부자가 되었는데 참 행복을 모른다면, 그것은 치료가 아니라 마취입니다. 오히려 병이 여전하고 가난이 여전해도,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만으로 충분한 삶, 그것이 진짜 치료입니다.

666은 이마에 새겨지는 바코드가 아닙니다. 특정 황제의 이름도 아니고, 미래의 전자 신분증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흉내 내되 하나님이 아닌 세력이 모든 시대, 모든 예배당 안에서 만들어내는 유혹의 이름입니다. 하나님 없이 이 땅의 것으로 안전과 행복을 채우려는 우리 안의 욕망, 하나님의 이름을 내 이름을 높이는 데 사용하려는 우리 안의 교만, 그것이 짐승의 표입니다.

베를린의 그 목사는 결국 교회를 지켰습니다. 번영을 약속하는 설교자들이 교인들을 데려갔지만, 그는 남은 자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
우리는 가난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표를 받은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당신의 이마에는 어떤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삶이 대답합니다.